[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19. 고된 피란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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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피란지 진해에서 살던 15세의 필자. 몇 달간 밥 먹고 운동만 하며 지냈다

진눈깨비가 내렸다. 폭풍도 몰아쳤다. 평안북도 신의주까지 올라갔던 국군이 중공군에 밀려 내려온 1951년 1·4 후퇴 당시 서울 날씨는 그랬다. 서울 계동에 살던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인천항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다른 경로로 이미 부산에 가 있었다.

인천항에는 미국의 전차양륙함(LST)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인천항에 군수물자를 내려놓고 빈 채로 부산으로 돌아가는 이 배에 우리 가족이 올랐다. 어떤 경로로 우리 가족이 이 배를 탈 수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확실히 모른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뾰족하게 생긴 이 배의 문이 열렸고 그 밑으로 강당만큼 큰 창고가 보였다. 피란민들이 타는 곳이었다. 배의 갑판에는 짐을 실었다. 이 강당 같은 창고 속에 들어가면 바깥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창문도 없었다. 다만 센 바람에 배가 심하게 흔들린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피란민들은 멀미에 시달렸다. 토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피란민들은 잘 때 필요한 요와 이불만 창고 바닥에 깔아놓았다. 가족끼리 모여 있었다. 한 가족과 다른 가족 사이에는 복도와 같은 길이 생겼다. 멀미를 참다 못한 사람들이 여기에서 구역질을 해댔다. 그리고 배는 아주 심하게 흔들렸다. 피란민들이 토해낸 것이 수증기가 돼 천장에 줄줄이 매달려서 배가 흔들리면 비처럼 쏟아졌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게 낫겠다.” 48시간쯤 지났을 때 여기저기에서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산으로 향하던 LST에는 한국 해군 군악대도 탔다. 그들은 어디에서 톱밥 같은 것을 가져와 지저분한 창고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피난민들의 시름을 달래주기 위해 이따금씩 금관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여기가 어디에요.” 지친 사람들이 물었다. “아직 인천 앞바다입니다. 풍랑이 너무 심해 출발하지 못했어요.” 흔들리기만 하고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죽을 지경이었다. 본래 배 멀미를 하지 않는 나도 몹시 힘들었다.

어느 날 비로소 하늘이 갰다. 비로소 인천을 떠날 수 있었다. 나는 갑판으로 이어진 계단을 발견하고 종종 갑판으로 나가 보았지만 배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갈매기 수십 마리만 배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고, 바다와 하늘이 온통 회색이어서 구분하기 힘들었다.

배가 처음 닿은 육지는 진해였다. 그 다음이 목적지인 부산이었다. 우리 가족은 진해에서 모두 내려버렸다. 피란길이란 것이 원래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부산까지 가기에는 육체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긴 항해를 견디지 못하고 우리처럼 진해에서 내린 사람들이 꽤 됐다.

진해 군항에 내리자 해군에서 트럭으로 피란민들을 실어 날랐다. 군인들은 진해 시내 중심가에 우리 가족들을 무작정 내려줬다. 진해 피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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