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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책임·정당·정책 정치가 실종된 대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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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대통령 선거가 다음달로 성큼 다가왔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전개된 대선 정국을 보면 민주화 20년의 한국 정치는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민이 바라는 멋진 정치란 책임지는 정치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진보정권의 성패에 대한 치밀한 토론조차 없다. 야권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이 시기를 폄하하고, 여권은 인기 없는 현 정권과 차별화하기에 급급하다. 물론 그 전통적 지지기반을 유지하겠다는 약삭빠른 속셈은 포기하지 않는다.

민주 정치의 기본은 ‘책임’ 정치다. 한국과 같은 단임제에선 대통령이 책임지지 못하므로 여권의 후보가 대통령 재임 기간의 성공과 실패를 대신 책임져야 한다. 따라서 여권은 진보와 좌파의 기치를 들고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서민들의 삶은 더욱 빈곤해졌고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됐는지에 대해 진솔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를 생략한 채 상대 진영 흠집 내기에 골몰하면서 흥행과 세 불리기로 표심을 유혹해도 국민을 설득하진 못할 것이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소위 좌파 정권의 경제정책은 무척 우파적이었다. 그 결과 비정규직은 폭발적으로 양산됐고 경제 불평등은 심화됐다. 많은 사람이 생활 여건이 악화됐음을 절감한다. 보수적 경제정책을 펼친 좌파는 대북정책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차별성을 표명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국민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다.

‘정당’ 정치 실현이 이번에도 물 건너가 버렸다는 사실은 또 다른 비극이다. 양김(兩金)의 분열에서 시작해 민자당 창당, DJP연합과 이인제 출마를 거쳐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은 당선을 향한 야합과 분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당 정치의 기준에서 볼 때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은 나름대로 당의 큰 틀을 유지한 채 그 속에서 대통령 후보를 선출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리더십의 부재로 경선 후유증과 내홍을 초래했고 결국 분열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장 진보적인 민노당에서 정당 정치의 기본에 충실하게 선출된 권영길 후보는 역설적으로 가장 전통적인 후보라 할 수 있다. 같은 정치세력을 세 번씩이나 대표하는 영예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국민이 고대하는 ‘정책’ 대결 역시 고개조차 못 들고 사라져 버릴 처지다. 여론조사에서 장기간 독주해 온 이명박 후보는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뒤 그야말로 ‘오만의 극치’를 보이며 다른 후보와의 토론회조차 거부했다. 그는 비판 세력이 ‘토목 전문가’로 부를 만큼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제외하곤 독창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지금은 무엇보다 부패 공방이 정치 무대를 독점해 정책대결의 여지마저 없어졌다. 실제로 이번 대선 판은 한나라당 출신 후보들이 각 정당에 진출해 벌이는 인물 경쟁의 성격이 강하다.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본가(本家)의 이명박과 가출한 이회창, 일찌감치 가출해 민주당을 접수한 이인제, 그리고 뒤늦게 뛰쳐나가 신당을 인수할 뻔한 손학규는 모두 신한국-한나라당 출신이다. 인물 경쟁이 정책의 대결을 대체하게 된 배경이다.

이제 국민은 부득불 후보의 사람 됨됨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선두를 달리는 이명박이 온갖 비난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비극적인 현실은 그가 비리의 만물상이라 할 만큼 다양하고 폭발적인 의혹의 재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유령 취업, 탈세, 주가 조작 등 매일 새로운 항목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은 여론조사에 기댄 채 결백과 억울함을 호소하며 의혹을 얼버무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치매에 걸리지 않은 유권자들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천문학적 부정 축재, 김영삼과 김대중 아들들의 썩은 정치, 가장 깨끗하다는 노무현 정권 핵심 세력의 부패를 생생히 기억하고 또 재발견하고 있다. 일말의 부패 의혹에 대해서도 검증을 중단할 수 없는 역사적 이유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