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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상록야학 졸업생 모교 찾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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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에서 직원 40여명의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이현주(남.45)씨. 지난 10일 오후 그는 서울 휘경동을 향했다. 목적지는 1호선 회기역 앞의 상록야학. 집안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마치고 재봉틀 공장에서 일하던 이씨는 1976~78년 이곳에서 중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그는 "그 뒤 정규 고교와 대학에 다녔지만 제일 정든 곳은 야학"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간 회사원 김홍수(37)씨 역시 일산(경기 고양시)의 직장을 떠나 상록야학으로 차를 몰았다. 85년 공장에 다니면서 고교반에 들어간 김씨는 야학 동창 임병희(여.34)씨와 결혼했으니 배움터이자 인생의 출발점을 찾은 것이다. 그는 "운전하는 동안 아내와 데이트하던 추억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날 상록야학 졸업생 11명이 모교를 찾았다. 야학 측이 졸업생과 재학생들 간에 만남의 시간을 마련한 것(사진). 76년 문을 연 상록야학은 지금까지 졸업생 2천5백여명을 배출했다. 현재는 3층 건물의 2층을 빌려 1백20여명의 학생이 중.고 과정을 공부한다. 수업료는 없으며 30여명의 교사는 모두 자원봉사자다.

오후 5시가 넘자 네평 남짓한 야학 교무실에 재학생 10여명까지 20여명이 발디딜 틈 없이 들어찼다.

참석한 재학생들은 "고등학생이니만큼 '할머니'가 아니라 '언니'라고 부르라"는 한금숙(여.67.고1 과정)씨를 비롯해 거의 다 50대 이상이었다. 과거에는 야학 학생들이 대부분 근로청소년들이었던 반면, 요즘은 못배운 한을 풀려는 장년 이상이 주로 야학을 찾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학생 후배들이 모두 30~40대인 졸업생 선배들보다 한참 손위여서일까. 처음은 좀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다.

이를 깨려는 듯 이현주씨가 말을 꺼냈다. "와,시간표 좀 봐요. 요즘은 주 5일제 수업이네. 우리 때는 토요일은 물론이고 일요일까지 수업했는데."

그때부터 졸업생 선배들의 입이 터진다.

"시설도 좋아졌네. 20여년 전 우리 땐 가마니 깔고 수업했는데 이젠 책.걸상도 있고."(이평진.44.사업)

"80년대 중반에 건물 지하실 빌려 쓸 때는 장마 지면 바닥에서 물이 콸콸 솟았어요. 그거 퍼 낸 뒤에 공부하느라 장마 때는 한 시간쯤 일찍 나왔죠. 그 와중에도 우리 동기 중에 커플이 세 쌍이나 나왔어요."(김홍수)

개교 때부터 30년 가까이 자원봉사 교사로 활동한 최대천(57.공무원 퇴직) 교감도 "지금까지 상록야학에서 부부 30여쌍이 나왔다"고 거든다. 그러자 재학생 김영영(50.건축업.중3 과정)씨가 응수했다. "연인이 옆에 있었으니 공장 갔다와서 밤 공부해도 힘든 줄 몰랐겠네."

화제는 이내 고단한 삶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사고로 장애를 입어 제가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꾸려요. 야학 마치고 집에 가면 밤 11시30분. 집안 정리 좀 하면 밤 1시. 너무 힘들어 요즘은 야학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이병애.여.46.고1 과정)

졸업생 신창석(42.사업)씨가 "절대 포기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검정고시를 통과했을 때 그 기쁨은 뭐라 말할 수 없어요. 합격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도중에 그만둔 친구들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어찌나 안타까웠던지."

이현주씨는 "일과 공부를 함께 하기 힘들어 그만두는 친구가 생기면, 교사들이 회사를 찾아가 사장을 설득해서 일을 덜어주기도 했다"며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살아간 야학이야말로 내 마음의 고향"이라고 추억했다.

참석한 졸업생 중 가장 어린 김덕곤(27.전남대 미술학과4)씨는 "야학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학생들에게 베풀기만 하는 선생님들이야말로 내 삶의 스승"이라며 "내 자신이 광주에서 야학 교사활동을 하며 베푸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고 말했다. 묵묵히 듣던 재학생 장영진(54.부동산업.중3 과정)씨가 한마디를 보탰다. "저두요, 대학까지 마치고서 야학 강단에 서는 게 소원입니다."

두시간 남짓한 만남이 끝나고 기자도 야학을 떠나려 할 때 박용준(45.공무원) 교사가 기자를 붙잡고 당부했다. "우리 전화번호(02-968-1923) 좀 내보내 주실 수 없을까요. 한 분이라도 더 배움의 길에 동참했으면 해서요."

글=권혁주.이경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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