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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17. 스승 김윤덕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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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실패들이 일렬로 단단히 고정돼 있어 잡음이 나지 않는 필자의 가야금(사진). 이 방법을 창안한 분은 김윤덕 선생이다.

“서양 음악이란 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저 사람들은 시끄러우면 무조건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단 말이야.”

이화여대 무용과에 가야금 반주를 하러 갔던 김윤덕 선생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가 한국무용 전공 학생들의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현대무용의 오케스트라 반주 음악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시끄러운 게 좋으면 종로 바닥에 나가 서 있으면 될 것 아닌가. 전차나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빨래하는 소리까지 한꺼번에 들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어려서부터 서양 음악이라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스승의 이 말은 나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조용한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함께 던져줬다.

내가 민속음악을 배우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스승이 김 선생님이다. 그는 가야금 산조의 전설적인 명인 정남희(1905~84)에게 47~48년 무렵 산조를 배웠다. 정남희는 50년 월북해 인민배우가 됐으며 평양음악무용대 교수를 지냈다. 김 선생이 나에게 가르친 산조는 정남희에게 배운 걸 그대로 전수하는 것이었다. 처음 배운 정남희류 산조는 40여 분짜리였다.

“정남희 산조야말로 산조 중의 최고다. 나무로 따지면 뿌리와 줄기, 가지와 열매가 있는데 이 음악은 다 갖춰진 나무와 같다. 소리가 귀에 달콤하게 들리는 산조에 현혹되면 안 된다. 뼈대가 분명한 것을 찾아라.”

스승의 가르침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나는 오직 정남희류 산조만 공부했다.

김 선생 자신은 정남희 산조를 배운 뒤 부산 피란 시절 강태홍(1894~1966)에게도 산조를 배웠다. 정남희·강태홍류 산조를 다 탄 다음에는 이 둘을 혼합하고 자신의 가락을 더해 김윤덕류 산조를 만들기도 했다. 가야금 산조는 유파마다 특징이 있지만 나에게는 정남희류 산조만한 게 없었다. 나는 김 선생의 뜻을 받아들여 다른 산조는 참고만 하는 정도로 했다.

가야금 음악 중에는 궁중에서 연주하는 정악뿐인 줄 알던 나에게 민속음악인 산조는 꿀맛이었다. 진양조부터 배웠다. 정악은 명상적이며 그림에 비유하면 문인화에 해당한다. 산조는 연주 기교의 극치를 보여주고 조이고 푸는 맛의 미학을 대표하는 예술이다. 민중의 희로애락도 그대로 담겨있다.

나의 첫 산조 스승인 김 선생은 아주 과학적으로 가야금을 가르치는 분이었다. 손으로 뜯고 튕기는 기법에 대해서도 아주 이해하기 쉽게 가르쳤다. 가야금 줄을 감아서 부들(밧줄)에 고정시켜 놓은 실패들은 원래 서로 닿지 않게 높이 차이를 두어 사선으로 배열했다. 조선시대 음악이론서인 『악학궤범』의 가야금 그림에는 실패들이 높았다 낮았다 지그재그 식으로 돼있다. 하지만 요즘 쓰는 가야금을 보면 이 실패들을 모조리 붙여서 일렬로 배치했다. 이렇게 바꾼 사람이 바로 김 선생이다. 농현(弄絃·음을 흔들어내는 기법)을 할 때도 잡음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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