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Blog] 삶의 지혜 묻어나는 노년의 아름다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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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겨울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영하의 날씨가 시작됐지요. 인생의 겨울은 아마도 노년이겠죠. 병들고, 힘없고, 삶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 시기입니다. 그러나 노년은 새 출발입니다. 몸은 땅에 묻혀도 그들의 흔적은 후손에게 이어지지요. ‘이브닝’(22일 개봉)은 ‘노년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영화입니다.

‘이브닝’의 한 대목은 쉽게 잊혀질 것 같지 않습니다. 두 명의 노파가 침대에 누워 서로 손을 꼭 잡고 지난 삶을 돌아봅니다. 한 명은 죽음을 앞두고 있죠. 올해 일흔의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연기한 ‘노년의 앤’(사진 )입니다. 쇠약해진 그를 옛 친구 라일라(메릴 스트립)가 문병 온 것이죠. 메릴 스트립도 벌써 58세나 됐네요.

앤이 라일라에게 묻습니다. 행복했냐고. 꽃다운 시절, 동시에 한 남자를 사랑했던 그 둘은 다른 남자의 아내로 평생을 살아왔지요. 라일라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때로는 행복했고, 때로는 아주 불행했고.” 두 할머니는 공감합니다. “각자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요.

‘이브닝’에서 레드그레이브의 존재감은 상당합니다. ‘모건’(1966년)과 ‘맨발의 이사도라’(99년)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두 차례 받은 그는 생과 사의 경계에 선 노년의 두 얼굴을 드러냅니다. 활기찼던 청춘에 대한 환상과, 남은 두 딸에 대한 애정을 두루 표출하죠. 줄곧 침상에 누워있지만 표정 하나, 말 한마디가 가슴에 박힙니다. 영화 막바지 잠깐 나오는 스트립도 이름값을 하고요.

‘이브닝’은 사실 젊은 영화입니다. ‘첫눈’에 반한 사랑의 희비극이 펼쳐집니다. 영국의 한적한 바닷가 별장도 매혹적이죠.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빠르게 오가며 사랑의 여진을 주목합니다. 당연, 20대의 앤과 라일라는 젊은 배우가 맡았죠. 레드레이브와 스트립의 딸도 비중 있게 나옵니다.

‘이브닝’에는 격정적 러브신도, 현란한 액션도, 기막힌 반전도 없습니다. 화끈한 걸 좋아하는 요즘 젊은이에겐 좀 심심할 것 같습니다. 줄거리도 여기저기서 들어본 것 같고요. 그럼에도 삶을 관조하는 지혜가 유유히 흐릅니다. 모두 두 노배우의 힘이죠. 5년 전 개봉한 주디 덴치 주연의 ‘아이리스’도 떠오르고요.

뮤지컬 ‘러브’ 제작진이 노인 배우를 못 구해 발을 구르고 있다는 소식(본지 11월 15일 27면)이 있네요. 충무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물론 ‘마파도’ ‘고독이 몸부림칠 때’ 같은 영화가 있었지요. 하지만 노인이 웃음의 자극제가 아닌 지혜의 파수꾼으로 나오는 그런 작품이 기다려지는 건, 꼭 계절 탓만은 아니겠지요.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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