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2. 일본과 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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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는 금족령에 묶였다. 2㎞ 이상 외출하려면 허가를 받으라고 했다. 이것도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총독의 관대함인가. 나는 곰곰 어제를 돌아봤다. 일제시대라는 것이 무엇인가.

일본 유학은 조선 학생들의 꿈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큰 명예이며 출세 코스로의 진입로였다. 그래서 모두 기를 쓰고 공부했다. 실력있는 사람은 들어갔다. 백선모라고 했다. 두줄의 흰 테가 있는 모자를 쓰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쓰고 싶어 응시했다. 1고는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가령 조선 출신 1백명이 응시했다고 하자. 성적이 좋다고 모두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었다.

출신 성분이 첫째 문제였다. 일본과 특수 관계가 있는 집안인가, 가령 중추원 참의라든지 도지사를 지낸다든지 등이다. 무엇인가 일본에 뚜렷한 공로가 있는 사람의 자식인가가 우선이었다. 그 다음에 시험성적이었다.

돈푼깨나 있는 집안 자식들은 처음부터 메이지(明治)대나 니혼(日本)대나 주오(中央)대 같은 데 들어간다. 돈만 있으면 일본 유학이 수월했던 것 같다. 게이오(慶應)대는 '모던 보이'였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화려한 모양으로 사각모를 쓰고 다녔다. 그들은 술집 아가씨들한테도 인기였다. 깔끔한 차림새에 돈 잘 쓰는 멋쟁이 대학생을 푸대접하는 풍습은 아무리 조선 출신이라 해도 없었다.

와세다(早稻田)대 학생들은 좀 달랐다. 기상이 드높았다. 그러나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은 고학을 했다. 신문.우유 배달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직장 생활이나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오쿠보에 있는 다무라작소에서 경리서기 노릇을 한 적이 있다. 트랜스를 만드는 공장이다. 또 가메이도에 있는 히다카공증사무소에 근무한 적도 있다.

나는 1고 시험을 한번 더 칠 작정이었는데, 학적이 없는 사람은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주오대 예과. 거기서 강원도 삼척 출신의 양준모(梁准模)씨와 어울려 도쿄(東京)역 뒤쪽 시오도메(汐留)에서 트럭 운전사의 조수 노릇을 한 적도 있다. 새벽부터 일해 하루 2엔 정도 벌었다. 그때 돈으론 컸다.

일은 힘들었지만 일급을 받은 뒤 유유히 진보초(神保町)로 가서 이와나미(岩波)서점에 들러 사고 싶은 문고본을 구입하곤 했다. 梁씨는 광복 후 유명한 민사사건 변호사가 됐다.

우리는 고학한다는 것을 숨겼다. 노동을 하면서 대학을 다닌다는 게 자랑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운사 작가

*** 바로잡습니다

2월 12일자 27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 AP통신 기자를 지낸 신화봉씨는 한자 이름이 '申化鳳'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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