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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 달러의 굴욕 약세 지속 … 곳곳서 ‘찬밥’ 신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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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1달러 지폐에 새겨진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의 초상을 눈물 흘리는 표정으로 그래픽 처리했다. [게티이미지/멀티비츠]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인도의 타지마할. 연간 3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리는 인류 문화유산이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750루피(약 1만7500원)가 필요한데 공식 입장료 5달러에다 각종 기금 명목으로 500루피를 내야 했다. 인도 관광청은 이달부터 아예 달러 입장료를 금지했다. 대신 750루피 전액을 자국 통화로 받기 시작했다. 달러 가치가 급락하자 인도 관광청이 내놓은 고육책이다.

타지마할 입장료 5달러는 ‘1달러=50루피’를 기준으로 책정했다. 하지만 현재 환율은 달러당 39루피로 내려갔다. 관광객 한 명이 5달러를 내고 들어갈 때마다 55루피 정도를 손해 본 셈이다. 인도 관광청은 “예전처럼 달러로 입장료를 받다가는 매년 1억6500만 루피(약 38억원)를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고 말했다.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달러가 주도하는 세계 질서)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덩달아 달러의 ‘굴욕’도 시작됐다. 지난 2개월 동안에만 주요 통화들에 대해 달러 가치가 5%나 떨어지면서 달러는 곳곳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외면당하는 달러=달러는 미국 내부에서도 기피 대상이다. 브라질 출신으로 미국 뉴욕 패션가를 누비는 세계적 모델인 지젤 번천(27). 그녀는 최근 미국 기업 ‘프록터앤드갬블’(P&G)과 계약하면서 달러화를 거부했다. 대신 유로화를 모델료로 요구했다. 번천의 쌍둥이 자매이자 매니저인 패트리샤는 “달러화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며 “앞으로 모든 계약은 유로화로 체결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뮤직비디오에도 달러시대의 종말을 암시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최근 방한한 ‘비욘세’의 남자 친구인 미국의 랩가수 ‘제이-지(Jay-Z)’. 그는 최근 ‘유로화’ 뭉치를 흔드는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최고급 롤스로이스 승용차를 타고 뉴욕의 화려한 밤거리를 휘젓는 장면에서 100달러 지폐가 아닌 500유로짜리 지폐 뭉치로 부를 과시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법정 화폐는 여전히 달러”라며 “유로화에 밀려 패권을 잃어가는 달러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이라고 분석했다.

달러는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찬밥’ 신세다. 최근 미국의 캐나다 접경 도시에는 캐나다에서 넘어온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달러와 캐나다 달러의 환율이 역전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예전에는 너무 비싸 엄두를 내지 못했던 미국 공연이나 스포츠 경기를 보기 위해 캐나다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수백㎞씩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당장 달러를 팔아 치우라”=세계 4위 산유국인 이란은 원유 결제통화에서 달러화를 뺐다. 베네수엘라도 원유 결제통화를 달러에서 유로로 바꾸는 것을 검토 중이다. 외환 거래가 엄격히 통제된 중국에도 최근 “당장 달러를 팔라”는 재테크 프로그램이 방영될 정도다.

달러에 고정된 환율제인 ‘페그제’를 포기하는 나라도 꼬리를 물고 있다. 달러에 연계된 자국 통화 가치가 덩달아 떨어지면서 부작용이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5월에는 쿠웨이트가 페그제를 폐기했고, 6월에는 시리아가 그 뒤를 따랐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도 페그제 폐지를 고려 중이다.

달러는 오래 전부터 세계적 큰손들에게서 외면받고 있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은 “달러 전망이 부정적이다. 요즘은 다른 통화로 수익을 내는 기업들의 주식을 사고 있다”고 말했다.

무역 흑자로 달러를 쌓기만 해 오던 중국의 행보도 이상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청시웨이 전인대 부의장은 “달러가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며 “1조430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을 강한 통화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1999년 전 세계 외환보유액의 71%에 달했던 달러 비중은 올 2분기에 이미 64.8%로 줄어들었다.

◆달러 약세는 미국에 득?=정작 당사자인 미국은 여전히 ‘강한 달러’론(論) 을 고수하고 있다.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은 “기축통화로서의 달러 지위는 흔들림이 없다”고 강조했다(9일·미국 의회). 폴슨 장관은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과 장기적인 체력이 환율시장에 반영될 것”이라며 자신감도 내보였다(20일·남아공 재무장관회의).

하지만 달러의 푸대접은 상당 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미국이 ‘강한 달러’를 외치지만 현실적으로 ‘약한 달러’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달러 약세 덕분에 미국의 9월 수출액은 사상 최고치(1401억 달러)를 기록했고, 무역적자는 2005년 5월 이후 최저로 떨어졌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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