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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비즈니스 메카로] 5 .우리도 한국 기업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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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명문화된 규제도 외국 기업의 활동을 위축시키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차별 또한 외국인 투자자를 멈칫하게 한다.

외국인들은 특히 최근 국내 금융산업에 외국 자본이 진출하는 과정에서 그런 차별을 느꼈다고 전한다.

*** 한국 기술 아니라고 냉대

제임스 루니 마켓포스 사장은 지난해 말 LG카드 매각을 둘러싼 한국 정부의 태도를 보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5년 동안 쌓은 탑을 스스로 무너뜨렸다"고 평가했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외국인 투자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한국은행에선 '국내 금융산업의 외국인 지분이 너무 높다'는 보고서를 냈다.

"LG카드를 인수하겠다는 한국인 투자자가 없자 며칠 뒤 외국인도 참여할 수 있다고 입장을 바꿨다. 그래도 이번 일로 외국 기업인들은 '한국이 외국인 투자를 더 이상 환영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제임스 루니 사장)

"외국인의 주식시장 시가총액 비중이 40%를 넘어서고 몇몇 시중은행이 외국계로 넘어가자 거부감을 갖는 것 같다. 토종자본을 육성해 외국자본에 대항하자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외국인들은 한국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투자하는 게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투자할 뿐이다."(UBS증권 마이클 진 서울지점장)

"외국인 손에 넘어가서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문제다. 최고의 상품과 서비스를 공급하면 되지, 그것이 외국인 소유냐 한국인 소유냐가 왜 문제가 되는가."(마르코스 고메즈 주한EU상의 회장)

특히 수입차 업계가 이런 '정서적' 차별에 민감하다. 다임러크라이슬러코리아 웨인 첨리 사장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제대로 대응도 못한 채 마음 고생이 많았다. 외국 제품을 쌓아놓고 화형식을 하는가 하면, 일부 주유소는 수입차에 주유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소비자도 수입차라도 본인이 마음에 들면 타겠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정부와 일부 언론의 인식이 여기에 못 미친다. 정부 통계가 수출하는 승용차는 자본재로 분류하면서 수입차는 소비재로 분류한다. 더구나 일부 언론은 '사치성'이라는 단어를 덧붙여 편견을 부추긴다."( BMW코리아 김효준 사장)

자동차 메이커인 독일 BMW의 헬무트 판케 회장이 지난해 10월 말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고건 국무총리를 만나 "승객의 안전을 돕는 신기술이 왜 '안전 기준'에 저촉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헬무트 회장이 언급한 신기술은 지난해 나온 BMW의 새 5시리즈에 장착한 ALC라는 조명제어장치. 굽은 길을 달릴 때 차량의 회전하는 쪽으로 전조등이 자동으로 움직여 운전자가 진행 방향을 잘 볼 수 있음은 물론 맞은편 운전자에게도 밝은 빛을 피하게 한다. 그런데 한국의 자동차 승인 기준은 '안전을 위해 전조등은 좌우로 회전하면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 팔리는 5시리즈에만 이 장치가 빠졌다.

BMW만 이런 경험을 한 게 아니다. 벤츠 등 다른 자동차 업체들도 열쇠 없이 차 문을 열거나 타이어 압력을 자동 측정하는 장치를 국내 기준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도입하지 못했다. 수입차 업계는 국내 자동차 업체들이 아직 이런 기술을 개발하지 못해 진입장벽을 친 게 아니냐는 생각도 한다. BMW코리아 金사장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차별에 예민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그렇게 본다는 게 문제"라며 "자동차 분야 외에도 이런 규제가 있어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숨짓는다"고 전했다.

퀄컴코리아 박문서 부사장은 요즘 정보통신부를 왔다갔다 하느라 바쁘다. 퀄컴은 휴대전화로 게임을 즐기고 콘텐츠도 볼 수 있는 무선인터넷 플랫폼으로 브루(BREW)라는 표준을 2년반 전에 개발했다. 국내에선 KTF가 브루를 쓰는데, 제동이 걸릴 것 같아 정통부 설득 작업에 나섰다.

"정통부가 이동통신업체에 국내에서 개발한 위피(WIPI) 표준만을 쓰도록 법제화할 움직임이다. 퀄컴 본사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며, 미국 무역대표부도 한국 정부가 국가 표준을 내세워 외부 기술을 퇴출시키려 드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기술이 나쁘거나 사업이 안돼 버린다면 몰라도 엄연히 잘 쓰는 기술을 한국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한다면 불공평하다."

호주 메쿼리금융그룹의 존 워커 한국 대표는 한국에서의 비즈니스는 몇년 앞을 예측하기 힘들다며 고개를 젓는다. 이 회사는 국내 민자도로 사업에 30년 운영권을 갖고 참여했다. 참여 초기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한국 정부는 외자유치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여건이 조금 나아지자 얘기가 달라졌다. 당초 투자원금 대비 수익이 85~90% 아래로 떨어지면 보전해주기로 했던 한국 정부가 투자자가 바뀔 경우(최초 투자한 A가 B에게 지분 양도)에는 계약을 다시 해야 한다는 조항을 들어 손실보전율을 낮추겠다고 통보해 왔다는 것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평가에 따르면 한국의 국제경쟁력은 대체로 10~20위권인 데 반해 대외 개방의 정도는 최하위권이다.

그래서인가. 외국 기업인들은 한국에서의 사업을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에 비유하며 '한국에서 살아남으면 세계 어디서도 살아남는다'고들 말한다. '한국에서 1년 생활은 다른 나라 10년 사는 것과 맞먹는다'라는 이야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제력에 걸맞은 제도 정비와 일관성 있는 집행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 진입장벽 아직도 많아

"외국 기업에 대한 제도적 차별은 거의 없어졌지만 공무원과 근로자 마음 속에는 여전히 차별이 남아 있다. 외국 기업인들이 원하는 것은 외국인 우대가 아니고 모든 기업을 위한 환경개선이다."(양수길 전 OECD 대사)

"내.외국 기업간 차별이나 역차별 시비를 없애려면 정부가 법과 규제를 일관되게 적용하고 정책을 변경할 때 사전 예고를 통해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박상용 보스턴컨설팅 이사)

특별취재팀=김정수 경제연구소장 양재찬.신혜경 전문기자 이종태.김광기 경제연구소 기자 이승녕.하현옥 정책기획부 기자 홍주연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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