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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령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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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북한의 총리는 공식 권력 서열 4위다. 북한군 창건 75주년(4월 25일) 열병식 때 김영일 총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에 이어 넷째 자리였다. 하지만 당·군에 숨은 실세들이 수두룩해 실제로는 20위 안팎이라는 게 정설이다. 내각은 당과 국방위의 손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총리 자리는 1972년 국가주석 제도 도입 이후 생겨났다. 김일성 주석은 자신이 24년간 지켰던 ‘내각 수상’을 ‘정무원 총리’로 이름을 바꿔 김일에게 넘겼다. 항일 빨치산 출신의 김일(金一·본명 박덕산)은 해방 직후 김 주석으로부터 ‘나밖에 본명을 모른다’는 뜻의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이후 총리 직을 맡은 인사는 8명이다. 그중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는 연형묵 총리(88∼92년)다. 그는 91년 9월부터 여덟 차례의 남북 고위급회담에 나와 굵은 바리톤의 함경도 사투리를 구사했다. 정원식 당시 총리와 남북 기본합의서및 3개 부속합의서에 서명했다. 그와 세 차례 회담을 한 강영훈 전 총리는 “순수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의 총리는 힘들고 위험한 자리다. 김일성 주석은 80년대 후반부터 “총리는 경제사령관”이라고 역설했다. 이후 총리들은 실권도 없이 경제파탄 책임을 지는 희생양이 되기 일쑤였다. 설상가상으로 민생경제는 핵·미사일 개발 같은 군수경제의 뒷전으로 밀렸다. 이근모 총리(86∼88년)의 불명예 퇴진을 시발로 연형묵은 자강도당 책임비서로 나가면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했다. 박봉주 역시 올 4월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다. 두 차례에 걸쳐 7년9개월간 총리를 했던 강성산은 중병설이 나돈다.

김정일 위원장은 권력 장악 뒤 경제 현장을 잘 아는 실무형 총리들을 발탁했다. 하지만 개혁·개방 정책을 놓고 내각과 당·군이 갈등을 빚을 때마다 김 위원장은 선군(先軍)노선을 밟았다. 반면 중국에선 장쩌민 국가주석이 국정 파트너였던 주룽지 국무원 총리에게 행정·경제 분야의 전권을 넘겨줬다. 위안화 절상 소문이 나돌면 주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문의할 정도였다. 당시 주룽지의 별명이 ‘경제 차르(황제)’였다. ‘총리=경제사령관’ 원칙을 중국에서 더 잘 지킨 셈이다. 하기야 한국에선 72년 이후 총리가 27번이나 교체됐으니 총리 직에 대한 개념이 없기는 남북한이 오십보백보라고나 해야 할지….

이양수 정치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