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걸어야 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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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킬(Kill) 저것도 킬(Kill). 킬킬킬!”
야심차게 준비해 간 원고에 PD가 사정없이 빨간 펜으로 X자를 긋는 걸 보면서 억울해 하는 새내기 방송작가가 있는가 하면, 연속되는 히트로 돈방석에 앉는 드라마 작가나 시트콤 작가도 있다. 오락 프로그램을 만드는 예능 작가, 다큐멘터리 작가, 뉴스 담당 작가부터 처럼 무한정의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작가도 있다.
그만큼 방송작가들의 종류는 다양해서 영역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소재를 발굴해내야 하는 창작의 고통만은 모든 작가의 공통된 숙명일 것이다.
스스로를 ‘자신의 경험을 파는 직업’이라고 말하는 방송작가들의 일상생활 모습은 과연 어떨까? PD들 사이에서 ‘못생기고, 혼자 살고, 담배 피우는 여자’라고 불리는 8년차 방송작가 S씨를 만나 보았다. “걸어야 쓴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그녀다. 대체 무슨 뜻인지 이제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Walkholic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S 1977년생 여자. 생업은 방송작가, 본업은 시나리오 작가, 부업은 프리랜서 기자, 미래(未來)업은 여행가. 그간 KBS <인간극장>, MBC <화제집중>에서 방송작가로 일했고 <빛의 세기 축제>, <다큐 세상 우리>등 다큐멘터리 작가로도 활동했습니다.

W 여러 가지 경험을 두루 했는데, 생업을 방송작가라고 말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S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모든 지원이 다 중단되는 집안의 원칙상, 대학 때부터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습니다.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과외도 있지만 따분했죠. 그러다 1998년에 방영된 드라마 <순풍산부인과>를 보고 감탄하며 ‘방송작가’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무작정 방송국으로 쳐들어가(?) 막내작가 생활을 했고, KBS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고 작가가 되었습니다. 좀 무모한 시작이었죠.(웃음)

방송작가의 정의를 내려 달라고 하자 “자고로 글 잘 쓰고 아이디어가 넘쳐야 하는 팔방미인들만이 도전할 수 있는 분야”라고 말한다. 그 자질이 조금만 뒤쳐져도 작가 생활이 지옥 같을 거라며 “많이 보고, 많이 배우고, 많이 쓸 자신이 있는 사람이 도전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작가를 한 단어로 표현해 달라고 부탁하자 무모함, 기다림, 무작정 걷기, 메모하기, 책, 여행 등의 단어들을 쏟아낸다. “작가치고 책과 여행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드물죠. 남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껴야 하기 때문인데 주변에 잘 나가는 작가들을 보면 현장답사에 충실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가령 아이템이 하나 정해졌을 때, 웬만한 작가라면 어느 장소를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하며 무엇을 얻을 건인지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 그래서 방송작가들 중에는 ‘뚜버기족’이 많다고. 주말에 동네 한 바퀴만 돌아도 수많은 사연이 눈에 들어온다고 하니 산책이 곧 아이디어를 낳고 아이디어가 곧 돈이 된다는 것이다. 평소에 얼마나 걷는지 궁금해서 물리적인 수치로 대답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바쁠 때는 2km, 한가할 때는 10km 정도”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한가할 때는 반나절 정도 거뜬히 걷고, 바쁠 때도 동네 3바퀴 정도는 걸으니까요.” ‘걷기의 매력’에 대해 이보다 더 잘 아는 직업이 있을까!

W 주위를 잘 살피는 편인 것 같다. 걸어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히 얻는 게 있다면?
S 산책하다 보면 모든 게 다 눈에 띄죠. 문구사 앞 오락기에 매달려 시간을 때우는 아이들, 표정이 우울한 개나 고양이들, 전단지를 붙이는 자들과 수거하는 자들의 날카로운 심리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사거리 전봇대, 불법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어느 집 대문, 시끄러운 음악소리로 이웃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언더밴드의 작업실 등등. 흥미진진한 삶의 현장이 무대 위에 진열된 작품처럼 거리 위로 다양하게 펼쳐지죠. 걷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여유롭게 관찰할 수도 있고 내 자신의 삶도 자주 돌아보게 된다고 할까? 그렇게 마음이 커지면 사소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좀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 되죠. 이렇게 말하고 나니 작가라는 직업이 꽤 멋지군요.(웃음)
W 걷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먼저 이야기를 건네기도 하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많을 법 한데.
S 몇 년 전, 새벽에 원고를 쓰다가 간식을 사러 나갔을 때였죠. ‘못 말리는 짱구’처럼 생긴 소년이 신문배달을 하고 있었어요. 너무 귀여워서 이야기를 붙여 잠시 놀았는데 알고 보니 병든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소년가장이었어요. 순간 머릿속에 ‘목동의 네로’ 라는 타이틀이 떠올랐고 <인간극장>에 소개할 생각으로 섭외를 했습니다. 아이와 할머니가 흔쾌히 출연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선불로 요구하는 출연료까지 사비를 털어 지불했죠. 그런데 촬영 날짜에 임박해서 갑자기 약속을 어기는 거예요. 출연료를 돌려주자는 손자와 절대로 내줄 수 없다는 할머니의 공방을 뒤로 하고 촬영계획은 무산됐습니다. 제 입장이 곤란하게 된 건 말할 수도 없죠.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부터 우리 집으로 신문이 배달됐어요. 신문 안에는 ‘다 읽으신 후 대문에 걸어놓으세요’라고 쓰인 쪽지가 있었죠. 미안함을 느낀 짱구소년이 신문보급소 소장이 읽는 신문을 날마다 미리 나에게 날라댄 거예요. 사실 매일 신문을 다시 걸어두는 건 귀찮은 일이었는데, 그때 폴 빌라드의 <버찌씨 아이(이해의 선물)>가 자꾸만 떠올라서 녀석의 배려를 모른 체 할 수 없었죠. 그렇게 1년 넘게 보급소 소장은 신문을 빌려주는 대가로 짱구소년에게 구두를 맡겨야 했고. 구두 닦는 걸 멈추지 않는 녀석 때문에 일부러 구두를 챙겨 신느라 보급소 소장도 고역이었다고 해요.(웃음) 저는 저대로 실수로 신문을 들고 외출 한 날이면, 미련하게 계속 기다릴 녀석 때문에 부랴부랴 집으로 다시 뛰어 들어와야 했고.(웃음)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방송작가의 일상이라는 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는 직장인들과는 정말 판이하게 다른 세계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만큼 직업병(예를 들어 사소한 것에서도 아이디어를 찾으려는)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W 친구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내가 이러고 산다”라며 한탄하는 직업병도 있을 텐데.
S 저는 일상에서 ‘뭔가 반드시 생각해야만 한다’는 개념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타고난 천성이 호기심 많고 공상을 좋아하다 보니 길을 걸을 때도 머릿속에 뭔가 항상 들어있는 편이죠. 방송작가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적성이 받쳐주기 때문일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마다 흥미롭고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고 궁금한 것. 그게 바로 천성이겠죠. 그때그때 떠오르는 단상들을 잊어먹지 않으려고 카메라와 수첩을 동반해서 순간순간 기록하는 습관이 일종의 직업병이라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W 새벽까지 원고를 쓰는 일도 허다할 것 같은데,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나?
S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사실 체력 소모는 꽤 많이 됩니다. 그래서 중도에 그만 두는 후배들이 많고. 일 욕심은 많은데 체력이 받쳐주지 않을 때가 가장 속상하죠. 하지만 저는 일보다는 건강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30대에 요절한 선배도 있을 정도인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유유자적 하면서 타인의 삶을 살피고 내 삶도 돌보며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진정한 치열함 아니겠어요? 저는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죠. 앞으로는 더 많이 여행도 다닐 생각이에요. 방에 쳐 박혀 글을 써야 할 때면 집 주변이라도 많이 걸으면서 몸도 챙기고. 그러다보면 그냥 얻어지는 아이디어들이 있으니까요.
평소 음악을 좋아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음악을 듣는 것보다 걸으면서 듣는 게 훨씬 좋아요. 가만히 앉아 있으면 오히려 우울해지고 몸도 무거운 듯하거든요. 무리한 운동이 체질에 맞지 않다는 의사의 얘기를 들은 후부터는 더욱 산책을 즐기게 됐죠. 인터넷 서핑이나 텔레비전으로 보는 세계에는 한계가 있다며, 걸으면서 명상을 하거나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게 되면 자신만의 발상들이 생겨나죠. 또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다 잠시 몸을 움직여주면 기분전환도 되고, 심각했던 일들이 사소하게 느껴져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가, 제 글에는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 많아요. 걷기를 즐길수록 세상을 보는 시선이 관대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사실 남보다 피로를 빨리 느끼는 약골에 신경도 예민한 편이지만 몇 년간 감기 한번 앓아본 적이 없어요. 아마 걷기가 체질화돼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언제부터인가 무작정 ‘걷기 여행’을 떠나는 통에 주변에서는 종종 황당해 하죠. 어느 날 갑자기 “나 지금 여행 중이야”라면서 전화를 하니까요. 그런데 돌아올 때는 편지며 작은 선물들을 챙겨 돌아오곤 했더니 이제는 내심 제가 어디로 떠나주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해요. (웃음)

W 앞서 ‘미래업’을 여행가라고 소개했는데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은 어딘가? 아니면 계획 중인 여행은?
S 사람들에게 더 새롭고 진솔한 얘기들을 많이 물어다 줘야 하는 업(業)을 가진 만큼, 사명감을 갖고 더욱 열심히 돌아다닐 생각입니다. 우선, 전 세계를 돌며 ‘유머러스한 에세이 다큐’를 만드는 것이 목표죠. 현재 워크홀릭(Walkholic) 기자로 활동하는 것도 이런 ‘세계여행준비’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나 홀로 국내 여행을 하는 것 보다 사람들의 반응과 의견을 살펴가면서 국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걷기 컨텐츠를 발굴하는 일, 정말 흥미롭지 않나요? 앞으로 뜻이 있는 제작자들, 함께 일하고 있는 워크홀릭 기자들과 여행 계획을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걷기의 매력과 여행의 기쁨을 생생하게 전할 생각이죠.

Tip 폴 빌라드의 <이해의 선물>
어머니를 따라 사탕가게에 들르곤 했던 한 어린이가 어느 날 혼자서 가게에 들렀다. 아이가 주인에게 사탕을 받고 돈 대신 버찌씨 6개를 내밀며 “모자라나요?”라고 물었을 때 주인은 “아니, 좀 남는 걸”하며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넉넉한 주인의 마음처럼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

Tip 위 인터뷰의 취재원은 현재 워크홀릭에서 맹횔약 중인 설은영 기자다. 방송작가의 세계를 가감 없이 전하기 위해 부득이 원고 맨 마지막에서 S의 정체를 밝히는 바다. 물론 S의 이야기는 모두 실화이고, 원고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설은영 기자의 성격은 ‘못 말리는 무한긍정주의 뚜버기’ 그 자체임도 밝힌다.

객원기자 장치선 charity19@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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