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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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아이들의 반응,특히 우리반 계집애들의 거의 일치된 주장에 대해서 욕쟁이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뭐라구…? 걔네들이 정말 좋아한다구…?』 『네에.』 계집애들과 몇몇 남자녀석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대답했다.마치 욕쟁이 선생님이「방학을 두 배로 늘려도 불만 없지?」라고 묻기라도 한것처럼. 욕쟁이가 교단에서 교과서를 들치다가 그만두고,교실의 아이들을 한바퀴 둘러보다가 말했다.
『아니 그럼… 너희들은 서로 좋아만 하면 교실에서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누가 말해봐.』 나서는 사람이 없자 욕쟁이가 정미를 찍었다.
『너는 아까부터 적극적으로 소리도 지르고 그랬으니까 어디 말좀 해봐.』 『그게 아니라요….』 정미가 자리에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그게 아니라요 라는 건 우리가 어른이나 선생님들하고말할 때 무조건 습관적으로 아무 뜻없이 앞에 붙이고 보는 말이었다.정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희가 말씀드린 건요,걔네들은 서로 진짜 좋아하니까 결혼도하고 그러기로 약속한 아이들이거든요,그런데 그렇게 죄인처럼 아이들 앞에서 끌고 가고 그러면요,지금은 둘이서 나란히 엎드려 뻗쳐를 하고 있다는데요,생활지도부에서요… 창피해 서 나중에 둘이 어떻게 결혼하고 그러겠느냐는 말이지요.그래서 선생님께서 가서 그애들을 좀 구해주셨으면 고맙겠다구 저희가 그런 거지요.그래주시면 걔네들도 그 은혜를 평생동안 잊지 못할 거구요.』 욕쟁이가 어쭈…? 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정미가 자리에 앉자교단에서 내려서서 맨 앞자리의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우리에게말했다.이런 자세는 욕쟁이가 오늘은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같이 이야기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
『솔직히 말해서 나도 정미의 말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어.너희들 말대로 내가 걔네들을 구해준다면 걔네들이나 너희들에게는 잘보이겠지만 말이야,올드 스톤 선생님이나 도깨비 선생님한테는 내가 팍 찍힐 거라는 거 알지.』 욕쟁이가 책상들 사이로 난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계속 말했다.
『흔히들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나 도덕이라는 게 어떤 건지 너희들 생각해 본 적 있니.종종 우리가 섞여 있는 사회에서 적당히 누구에게도 특별히 미움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같은 거에 지나지 않기가 일쑤인 거야.이건 교과서에 있 는 이야기는아니지만 말이지.… 자,우리 교과서 진도나 나갈까.』 동준과 수미는 그날 종례가 끝날 때까지도 교실에 돌아오지 않았다.그리고 교실의 동준이 자리는 다음날에도 비어 있었다.학교측의 처벌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결석이라고 했다.내 자리는 교실의 맨뒷자리였으므로,수업시간 중간중간에 수미가 동준의 빈 자리를 멍하니바라보는 걸 훔쳐보고는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도깨비는 동준과 수미를 나란히 엎드리게 해놓고,동준에게 수미의 매까지 맞을 용의가 있는지를 묻고 나서 동준이만 스무대나 때렸다고 했다.그것도 6교시를 마치고 생활지도부로 찾아간 욕쟁이가 거의 싸우다시피하며 말린 결과라고하였다.동준의 빈 자리에는 우리들이 다같이 감수하고 있는 굴욕적인 청춘이 앉아있다는 생각이 들고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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