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26> 당신은 무엇에 물이 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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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며칠 전 동료 기자들과 극장에 갔습니다. 리안 감독의 영화 ‘색, 계(色, 戒)’를 봤죠. 놀랍더군요. 감독의 칼날은 여전히 날카롭게, 그리고 깊이 있게 관객의 폐부를 찌르더군요. 극장을 나서는 이들의 평은 ‘10인10색’이었죠. 각자의 시선과 처지에서 ‘색’과 ‘계’를 풀이하니까요.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물듦’과 ‘알아챔’에 대한 영화라고 봅니다. ‘색’이 뭘까요.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상(현상)이죠. 그 속에는 내가 아끼는 모든 게 담겨 있죠.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나의 친구, 나의 미래, 나의 재산, 나의 명예 등등. 그럼 그중 하나를 꺼내 보세요. 그리고 내 마음을 갖다 대세요. 애틋한가요, 살가운가요. 그렇다면 나는 이미 거기에 물이 든 거죠.

리안 감독은 그런 ‘물듦’을 ‘남녀의 사랑’에 비유하더군요. 1930년대 중국 상하이가 배경이죠. 여주인공은 매국노를 죽이기 위해 그에게 접근하지만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돌이킬 수 없는 강도로, 순식간에 물들고 말더군요. 그들의 사랑을 보면서 저는 ‘색’의 힘을 봤습니다.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색’의 강고함, 닥치는 대로 물들이는 ‘색’의 무자비함을 봤습니다.

그러나 부처의 말씀은 다르네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합니다. 그 강고한 ‘색’도 본래 텅 빈 것이라고 하네요. 그러니 ‘색’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 너머를, 그 바탕을 보라고 합니다. 그래야 ‘본질’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를 살피라고 하네요. 내가 사랑에 물이 드는가, 내가 짜증에 물이 드는가, 내가 자식에 물이 드는가. 그걸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그럼 ‘색, 계’에서 ‘계’는 무슨 뜻일까요. 맞습니다. ‘계율’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계율은 ‘계율을 위한 계율’이 아니죠. 바로 ‘물듦’을 막기 위한 계율입니다. ‘내가 물드는 걸 알아차리고, 물들지 않기 위해 깨어있으라’는 게 ‘계’의 본뜻이죠. 물들기 전의 청정함을 안다면, ‘물듦’은 정말 두려운 일이죠. 영화 속 여주인공도 마지막 순간까지 ‘물듦’을 두려워하죠. 그렇게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결국 무너지죠.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애잔합니다. ‘물듦’에 무릎 꿇은 인간사가 보이기 때문이죠.

그래서일까요. 부처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가라’고 하셨죠. 또 예수는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죠. ‘생이란 한 조각 구름이고,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는 것이다.’ 구름이 없어지면 무엇이 남을까요. 창공이죠. 원래부터 존재하던 푸른 창공. 그러나 우리가 한 조각 구름에 물들어 버린다면 ‘창공’을 볼 수 없습니다. 구름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으니까요.

그러니 물들지 말아야죠. 그래야만 구름 속에서 창공을 보고, 창공 속에서 구름을 보게 되죠. 그럴 때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구름만 붙든다면 ‘색즉시색(色卽是色)’에 머물고 마는 거죠. ‘공’을 찍고 돌아오지 않는 모든 ‘색’은 한 조각 구름일 뿐입니다.

리안 감독이 ‘와호장룡’의 대나무숲에서 보여준 ‘색’ 속의 고요함,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보여준 로키 산맥의 설산과 푸른 창공을 보세요. 그들은 결코 물드는 법이 없죠.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입니다. 자신을 물들이지 않을 때 우리도 그들과 하나가 되겠죠. 그러니 오늘 하루도 살펴 보세요. ‘나는 언제, 어디서, 무엇에 물이 드나.’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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