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현대車 유치전' 뜨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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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기업이 정권의 생사(生死)를 결정한다고 하면 코웃음을 칠 한국 정치가들이 많겠지만, 동유럽에서는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폴란드 레셰크 밀레르 총리가 이끌고 있는 좌파 소수정권의 운명은 한국의 현대자동차에 달려있다고 10일 보도했다.

이미 푸조와 도요타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는 데 실패해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폴란드 좌파 내각이 이번 현대차 투자마저 경쟁국에 빼앗길 경우 정권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폴란드는 슬로바키아와 함께 현대차의 첫 유럽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현대차 공장을 유치하면 최소 14억달러의 자금이 들어오고 3천명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는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모두 오는 5월 유럽연합(EU) 가입을 앞두고 있어 유럽 수출의 교두보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데다 인건비도 EU 국가의 25%에 불과해 이들 지역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이달 말 현대차의 최종 결정을 앞두고 양국은 현대차에 법인세 감면 등을 통해 투자금액의 15%에 가까운 혜택을 주기로 하는 등 유치를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폴란드는 밀레르 내각 전체가 나서 현대차 투자의 계약조항을 직접 챙기고 있다. 폴란드는 도로 등의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좋은 중공업 지대인 실레지아 지역의 코비에르쥐스에 2백50ha에 이르는 공장부지를 제공하는 한편 한국어학교도 개설해 주기로 했다.

폴란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빠른 경제성장으로 중부 유럽의 '호랑이'로 명성을 떨쳤지만 2000년 이후 개혁정책이 시들해지고 관료주의가 되살아나면서 경제 침체를 겪어왔다.

이런 분위기 탓에 폴란드는 두 건의 대규모 외국인 투자 유치에 실패했다.

최근 PSA푸조-시트로앵은 슬로바키아에 공장을 설립했고, 도요타와 시트로앵의 합작법인은 체코에 공장을 짓기로 합의했다.

투자 유치에 실패한 뒤 폴란드는 별도 정부기구를 만들어 관료주의 등 외국인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부분을 점검하는 한편 불투명한 세법도 개정했다. 폴란드는 또 슬로바키아보다 자동차 부품 산업이 발달돼 있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으며, 현대차가 유럽연합에 진출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슬로바키아도 파볼 루스코 신임 경제장관이 나서 현대차와 협상을 벌여왔다.

슬로바키아는 폴란드.체코의 자동차 부품업체들과 밀접해 있는 북부 질리나 지역에 폴란드와 비슷한 수준의 땅을 제시했다.

또 어학교육시설과 병원 등을 제공하고 수송로 확장과 세금감면 등도 조건으로 내걸었다.

슬로바키아는 낙후된 경제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 블라디미르 메시아르 총리가 앞장서서 최근 경제 재건과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해왔다.

컨설팅 회사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 프라하 사무소의 매튜 포틀 파트너는 "최근 몇 년간 슬로바키아 정부는 (외국기업의 생산기지로서) 자국을 선전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둔 반면 폴란드는 슬로바키아만큼 투자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올해 2분기 중 유럽차 공장을 착공해 2007년부터 연간 30만대의 소형차를 생산할 계획이며, 생산 차량을 모두 서유럽으로 수출할 계획이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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