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에서>釋迦의 깨달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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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석가는 29세때 깨달음을 위한 수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왕자로 태어나 속세의 쾌락과 안일을 만끽한 그가 당초,수도의 방법으로 난행고행(難行苦行)을 택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그러나그는 6년간의 모진 고행도 공허하다는 결론에 당 도,이 고행을통한 정진노력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는 후일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즉『(불사와깨달음의 경지인)열반(涅槃)에 도달하려면 두가지 잘못된 길을 피해야 한다.하나는 쾌락에 탐닉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고행에 몰두하는 길이다.이 양(兩)고락의 잘못된 길을 버리고 「정견등팔정도」(正見等 八正道),즉 중도(中道)의 길이야말로 열반에 이르는 옳은 길이다』라고….
고행을 버린 그는 홀로「아시밧드」라는 한그루의 나무밑에서 홀로 명상에 잠겼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보리수(깨달음의 나무)밑의 명상이다.이 보리수의 주변을 7일 간격으로 조금씩 이동하면서 명상 시작후 49일만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악마의 유혹을 극복하고 결국 인간 궁극의 모습을 찾아낸 것이다.
여기서 시사하는 것은 애욕을 탐하면 쾌락을 얻되 마음의 평화를 못얻고 반대로 신체를 학대하면 피로해질뿐 정신집중이 안되어진리탐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양극단을 떠난 중도가 정도(正道)라는 그 깨달음이 헤겔「변증법」의 합(合)으로 이르는 과정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도「이것이냐 저것이냐」모색하면서 그의 철학을 전개했듯이 무릇 종교와 학문이 합을 추구하는 모색에서 탄생되었다면과장일까.합을 생략,무시한 유물사관(唯物史觀)은「이것이 아닌 저것만」의 극단론으로 결국은 오늘날 공산정권의 붕괴를 자초하고말았다.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사회를 어지럽히는 허황된 극단논리.흑백논리가 횡행하고 있는데 이런 사고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몰(沒)이해와 비협조,그리고 극단은 한 칼날의 안팎과 같으며 이들이 설치는 곳에는 불안과 혼란이 있을뿐』이라는 옛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말이 반추되는 요즘이다.
〈한미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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