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퇴직·개인 연금, 3층 설계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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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 15면

윤석명·경제학박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금보험팀장

기고-세계은행이 권장하는 '연금테크'

자식이 든든한 노후 대비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이 들어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자식에게 노후를 의존하는 관습이 오랫동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 속에 살아왔던 우리 부모세대는 자식 잘 키우는 것이 가장 안전한 노후대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대가족 사회가 붕괴되고 핵가족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대부분의 국가가 공적연금(국가에서 운영하는 연금제도)을 서둘러 도입하였다. 이미 100여 년 전에 공적연금제도를 도입한 선진국의 노인들은 자식 대신 연금에 의존하면서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런 연금제도에 빨간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노인의 숫자는 급격하게 증가하는 반면 노인을 부양할 경제활동인구가 기대만큼 늘지 않아 ‘적게 내고 많이 받는’ 연금제도를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위기감을 느낀 각국 정부들이 ‘적게 받고 더 부담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고치려 해도 연금액 삭감을 두려워하는 국민들의 반대에 부닥쳐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만으로는 감당 못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960년에 도입한 공무원연금의 재정이 불안정하여 내년에 1조2500억원의 세금을 투입해야 한다. 이런 문제점을 고치려 해도 공무원들의 반대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민연금 역시 올해 7월 우여곡절 끝에 재정안정을 위해 제도를 개선했으나 근본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악화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는 우리나라에서 제때에 제도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국가적 재앙으로 비화될 전망이다. 1970년만 해도 17명의 근로인구가 한 명의 노인을 먹여 살렸으나, 2050년에는 1.4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해야 한다. 제때 고치지 않으면 후손들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런 데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노후 대비책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다. 있다 해도 공적연금제도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이 정도로는 앞으로 다가올 초고령 사회(노인인구 비율이 20%)를 감당할 수 없다.

국가·기업·개인이 노후책임 나눠야
이런 문제를 인식한 세계은행은 1994년 ‘노년기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라는 보고서를 발간하여 노후설계의 기본방향을 제시하였다. 세계은행은 이 보고서에서 초고령 사회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노후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현재와 같은 공적연금제도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국가가 공적연금으로 국민의 노후를 모두 책임지는 대신 근로자를 고용하는 기업과 국민 개개인이 골고루 책임을 나누는 권고안을 제안하였다. 노후소득보장에서 국가의 역할을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나머지는 민간 부문이 그 책임을 맡도록 한 것이다. 즉 노후에 먹고사는 문제를 국가가 운영하는 공적연금제도와 민간이 책임지는 민영연금의 균형된 발전을 통해 해결하도록 제안하였다. 주식투자에서 흔히 사용되는 종목 분산을 통한 위험 최소화 전략을 노후소득보장체계에 적용한 것이다.

세계은행이 제안한 전략은 다층 소득보장제도다. 1층은 국가가 운영하는 공적연금제도, 2층은 기업이 책임지고 운영하는 기업연금제도, 3층은 개인이 직접 민간 금융기관을 통해 노후자금의 일부를 저축하도록 설계했다. 이를 위해 공적연금 재원은 세금 또는 가입자의 보험료로 마련하되, 최저생계비 이상의 연금액이 보장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도록 권고하였다.

단, 세금으로 공적연금의 재원을 충당할 경우에는 고소득자를 연금혜택에서 제외하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국가의 도움이 필요 없는 고소득층에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 근로계층의 허리가 휠 정도로 많은 세금을 걷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 기업의 사용자가 부담하는 퇴직금(우리나라의 경우 월 급여의 8.3%를 퇴직금으로 지급)을 일시금이 아닌 연금, 즉 기업연금으로 전환하여 직장을 옮길 때마다 퇴직금으로 받아 써버리는 관행을 없애라고 주문하였다. 이는 대다수 근로자가 퇴직 후에 안정적인 소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개인이 근로소득의 일부를 떼내 민간 금융기관의 개인연금 또는 연금보험에 가입함으로써 개인 책임의 노후소득을 추가로 준비하도록 제안하였다.
세계은행의 노후 설계안이 제시된 이후 대다수 국가가 공적연금과 민영연금이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게끔 노후소득보장체계를 재구축하고 있다. 세계은행의 노후 설계안이 세계 각국에서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퇴직연금 강제해야
우리나라 역시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으로 이루어진 3층 제도를 도입하고 있어 외형상 세계은행의 권고안을 적극 수용한 국가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먼저 국민연금이 최소한의 안전망으로서 노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재정안정화 노력이 따라야 한다.

2005년에 도입된 퇴직연금은 퇴직금과 퇴직연금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허용하고 있어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퇴직연금을 강제화하되 기업주에게는 손비 인정 규모를, 근로자에게는 세제혜택 범위를 확대하는 유인책이 필요하다.

개인연금은 고소득 근로자의 세(稅)테크 제도로 전락했다. 저소득층과 자영업자가 개인연금에 적극 참여하도록 추가적인 세제혜택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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