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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상인 후예들, 불황 때 빛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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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불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재계 내 개성상인 출신들의 기업이 주목받고 있다. 한일시멘트.태평양.신도리코 등 대표적인 개성상인 기업들이 지난해 돋보이는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송상(松商)의 피를 이어받은 이들 기업은 2세, 3세 경영체제로 넘어가면서도 '자린고비 정신'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경영 철학을 이어가고 있다"며 "이런 경영철학이 불황기가 되자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돋보이는 실적=대표적인 개성상인 기업으로 꼽히는 한일시멘트는 지난해 6천2백87억원의 매출을 기록해 9% 가량 성장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시멘트 업계 전체가 지난해 화물연대 운송거부 사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영업이익이 2002년(5백15억원)보다 87.5%가량 증가한 9백67억원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고(故) 허채경 회장에 이어 장남인 허정섭(65) 명예회장이 경영을 맡고 있다.

신도리코도 대표적인 개성상인 기업. 2세인 우석형(48) 회장이 경영을 맡고 있는데, 지난해 6천2백억원 가량의 매출을 기록해 전년보다 20% 성장했다. 태평양도 지난해 화장품 업계가 두 자릿수 매출 감소를 겪은 것과 달리 매출 1조1천억원으로 2.9% 늘었고, 순익(1천5백억원)은 38% 뛰었다.

◇경영철학=창업주들은 '남의 돈으로 사업을 하지 마라'는 등 독특한 경영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가정교육이나 경영수업을 통해 2세, 3세들에게 이를 전수했다. 그 결과 이들 기업에는 아직도 창업주의 경영철학이 곳곳에 배어 있으며, 이것이 불황기에 좋은 성적을 내는 원동력이 됐다.

한일시멘트의 경영목표엔 아예 무차입 경영이 들어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허명예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남의 돈을 갖다 장사하려면 아예 장사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고 말했다. 신도리코는 1960년 창업 이후 단 한번도 외부에서 돈을 빌린 적이 없으며, 이 원칙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창업주 고(故) 우상기 회장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창업이래 화장품 하나만을 해온 태평양이나 창업이래 30년 동안 공업용 기초화학 제품 생산에 매달리고 있는 동양제철화학처럼 이들 기업은 '최고가 될 때까지 한 우물만 판다'는 원칙도 지켜가고 있다. 또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일시멘트 관계자는 "당장 손해보더라도 신용을 잃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이 돌아온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개성상인이란=개성과 개성 주변 지역 출신들로 개성시민회와 개성상고.송도고 동창회 등을 통해 강한 결속력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50~60년대 녹십자 등 개성출신들이 창업하는 기업에는 개성출신만 주주로 참여할 정도였다. 이북 5도민회 중 유일하게 '송도'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2세 경영인들에게도 부친 세대의 두터운 유대감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엔 다른 지역 출신 기업들의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 조심하는 편이라고 한다.

한국화장품 임광정(85)명예회장과 임충헌(63) 회장, 한국제지를 설립한 고(故) 단사천 회장의 아들 단재완(50)회장, 대한유화 이정호(80) 회장과 이순규(43)사장, 서흥캅셀 양창갑(82) 회장과 양주환(54)사장 등도 이에 포함된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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