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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떠난 자와 남는 자(16) 태성이 장씨를뒤로 물러서게 하며 말했다.
『왜놈 밑에서 이렇게 사는 것만도 억울한데,죽어 조상 볼 낯이 없는 우리들인데,그런 조선사람끼리 네가 우리를 팔고 다녀?』 『무,무슨 말입니까.』 『바른 대로만 대.너 무슨 짓을 한거야? 몰라서 묻는 게 아냐.직접 네 입으로 듣자는 거다.』 고서방이 그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이 새끼가 어디서! 지금 핫바지 저고리가 걸어다니는 줄로 아나.』 장씨가 다가섰다.
『또 어느 놈이냐.너랑 한패가 돼서 우리 조선사람 일이라면 미주알 고주알 일러바치는걸 업으로 삼고 다니는게 누구 누구야.
』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압니까?』 『아픈 사람 있으면 꾀병쓴다고 고자질 하고,콩윷 논거까지 도박했다고 일러바치고…입에 담기도 싫다만 그게 너하고 또 누구 짓이냐 말이다.』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아저씨,선생님들 정말 왜 이러세요.태성이너라도 말 좀 해다오.』 『새도 오래 앉아 있으면 화살을 맞는법이야.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것도 그 소리고.』 『글쎄,저는 금시초문,모르는 소립니다.』 장씨가 고함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더 볼 것도 없다.거기 구덩이 하나 파라.살려둘 것도 없다.이 새끼를 그냥 여기다 묻어 버리자.』 태성이가 구덩이를 파기 위해 삽자루를 잡았고 고서방이 태길이의 옆구리를 내지르며 말했다. 『어서 대.이 미물같은 놈아.너 하나 여기 묻고 나 몰라라 하는 건 한강에 배 지나가기야.』 그때 태길이의 입에서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저,길남이.요시오 그 자식입니다.』 태성이 삽질을 멈추었고,셋의 얼굴이 한순간 어두컴컴한 막장 안에서 부딪쳤다.
『뭐야? 길남이? 이 새끼가 아주 악질이구만.』 곡괭이를 거꾸로 잡은 장씨가 태길이의 어깨를 부수듯이 내리쳤다.비명소리가이어지며 옆으로 넘어지는 그의 몸을 마치 자루처럼 고서방이 바로 앉혔다.
『너 지금 이렇겠지.이러다가 목숨만 붙어 나가면 왜놈한테 다불어 버리겠다.그 생각 뿐이겠지.』 『아닙니다.아닙니다.살려만주세요.』 『살려 줘? 뭘 어쩌라고 너같은 놈을 살려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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