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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그후 100년…] 일본·러시아의 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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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 러.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9일 제물포(인천)에서 일본 군함의 공격을 받고 폭파돼 불길에 휩싸인 러시아 함정 ‘바략’과 ‘코레예츠’. 사진은 영국 주간지 ‘디 일러스트 레이티드 런던 뉴스’가 1904년 4월 2일자에 보도한 화보. [명지대 LG연암문고 제공]

1백년 전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한반도를 무대로 러시아와 일본의 이해가 뒤얽혀 있는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다만 러.일 전쟁을 바라보는 양국의 시각은 엇갈린다. 일본의 보수세력은 과거의 '돌격 앞으로'를 되살리겠다는 뜻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반면 러시아는 러.일 전쟁을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입장이다.

*** 일본의 시각 "당시 기운 되살리자"

"군사력 키우자" 목소리 커져…일부선 '잘못된 전쟁' 반성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지난달 28일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는 러시아의 지배에 있던 북.동유럽은 물론 이집트로부터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아프리카 민족운동에 큰 희망을 안겨줬다"며 "러.일 전쟁은 세계사의 톱니바퀴를 크게 움직인 전쟁이었다"고 평가했다. 나가사키(長崎)를 무대로 한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 러.일 전쟁 전에는 일본인들을 '파리와 거미를 먹는 민족'으로 묘사했다가 전쟁 후 그 부분이 삭제된 것도 일본이 힘을 통해 '대국'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1904년 2월 10일 선전포고된 러.일 전쟁을 '일본의 성인식'으로 규정하고 당시의 기운(氣運)을 되살리자는 움직임은 지금 일본 전역에서 뚜렷하게 진행 중이다. 유사법제가 통과되고 자위대가 이라크로 파견되는 등 수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이뤄지는가 하면, 집단적 자위권 보장.무기 수출 허가 등 군사적 색채가 강한 온갖 논의들이 당당하게 이뤄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외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는 지난 2일 도쿄에서 열린 러.일 전쟁 1백주년 기념 심포지엄 '일본의 결단-국가전략 어떻게 짜야 하나'에 참석해 "전쟁은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난다. 하지만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러.일 전쟁의 경우에서 우리는 이를 분명하게 지켜봤다"며 승리 예찬론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다. 러.일 전쟁을 태평양 전쟁의 도화선이 된 '잘못된 전쟁'으로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일본의 힘'쪽으로 급격하게 쏠리는 분위기다.

러.일 전쟁을 보는 일본의 시각이 새삼 관심을 끄는 이유는 최근의 국제 정세가 러.일 전쟁 당시와 흡사하다고 보는 시각이 일본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산케이신문도 지난 4일 "러.일 전쟁 당시의 정치.군사 상황은 이라크에의 자위대 파견을 통해 '국가의 자질'을 재정립하는 기로에 서 있는 일본의 현재 상황과 흡사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러.일 전쟁은 21세기에 어떤 형태로 복제될 것인가.

*** 러시아의 시각 "복수 대신 교훈 얻자"

국영방송 다큐멘터리 방영…한반도 주변국 협력 제안

러시아는 러.일 전쟁에서 교훈을 보고 있다. 21세기의 신흥 강국으로 도약할 기회를 맞은 지금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각오다.

러시아 언론들도 러.일 전쟁 1백주년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국영 방송인 'RTR'는 전함 '바략'의 공적과 제물포 해전을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9, 10일 이틀간 방영한다.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이 발간하는 시사.역사 월간지 '조국'은 올해 1월호에서 50여쪽에 걸쳐 러.일 전쟁과 관련한 역사학자들의 논문 13편을 특집으로 실었다. 러.일 전쟁과 관련한 단행본과 전시회도 줄을 잇고 있다.

'바략'호(순양함 1만1천7백t급)와 '코레예츠'호(초계함 8백t급) 등 3척의 러시아 함대는 11일부터 나흘간 인천을 방문한다. 러.일 전쟁 당시 제물포 부근에서 전사한 러시아 수병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열기 위해서다. '바략'(노르만인이라는 뜻)과 '코레예츠(한국인이라는 의미)'호는 일본 군함과 맞서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은 러시아 전함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들 기념행사에서 '복수'의 냄새는 풍기지 않는다. 물론 일부 보수층이 "러.일 전쟁의 치욕을 잊지 말고 일본에 돌려주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세는 '냉철한 분석'이다. '대책 없는 반일'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주한 러시아대사를 지낸 게오르기 쿠나제 국제경제.국제관계연구소 주임연구원은 "러시아는 경제.외교 분야에서 일본 및 주변 강국과의 협력을 통해 이익을 챙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일본.중국.러시아 등 열강들이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1백년 전의 동북아와 오늘날의 상황을 단순 비교해선 안 된다"며 "동북아 강국들이 한반도의 안정을 바라고 있고, 북핵 문제에서 한반도 주변국들이 협력하고 있다는 점이 그 증거"라고 지적했다.

모스크바.도쿄=유철종.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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