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숨막히는 긴장 … 적나라한 정사신 참을 수 없는 욕망의 이중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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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영화 ‘색, 계’에서 열연한 탕웨이<左>와 량차오웨이. 특히 신인배우 탕웨이는 순수와 욕망이란 여인의 두 얼굴을 능숙하게 소화해 냈다.

올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이라는, 예술 영화의 훈장 같은 것을 달고 찾아온 ‘색, 계’(色, 戒)는 사실 고품격 대중 영화에 가깝다. 다소 낯간지러운 고품격이란 수사를 용서하시길. 입소문이 난 대로, 벌거벗은 남녀 주인공이 기예에 가까운 격한 체위를 보여주는데 선정적인 눈요기를 넘어 거기에 실린 감정의 흐름이 제대로 읽힌다는 뜻이자, 그래서 주최 측의 변명 같은 ‘영화에 꼭 필요한 장면’이란 말이 수긍되는 영화라는 뜻이다.

거기다 2시간 37분의 긴 상영시간을 감정과 긴장의 이중주로 채워 나가는 방식이 퍽 과감하다. 이 감정의 궤도에 올라타지 못하면 진부한 제자리걸음으로 보일 수 있단 얘기다. 그럼에도 합당한 기대치를 가진 관객이라면, ‘색, 계’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상영시간의 길이를 잊게 할 만큼 매혹적인 영화다.

줄거리는 흡사 상하이판 마타하리다. 1940년대 초 상하이, 친일 괴뢰정부의 첩보장교 이 선생(량차오웨이)에게 여주인공 왕치아즈(탕웨이)가 신분을 감추고 접근한다. 마작으로 소일하는 그의 부인(조안첸)과 놀아 주면서 이 선생을 암살할 기회를 엿보려는 목적이다. 영화의 첫 대목이 바로 그런 마작판이다. 부인네들의 소일거리 노름판에서 희한한 긴장을 빚어내는 연출부터 예사롭지 않다. 그 실체는 점차 드러나는 대로다. 가짜 신분을, 이 선생과의 불륜관계를 감춘 왕치아즈의 중첩된 긴장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마타하리 노릇이 대의명분보다 연기, 즉 일종의 놀이로 시작됐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그녀가 일제 침략을 피해 홍콩에서 대학을 다니던 모습을 보여 준다. 왕치아즈는 열혈 청년 광위민(왕리홍)의 권유로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연극무대에 서고, 관객의 반응에 희열을 느낀다.

광위민은 마침 홍콩에 온 친일파 이 선생의 암살 계획을 세운다. 왕치아즈의 역할이 바로 홍콩사업가의 아내 ‘막부인’으로 위장해 이 선생 부부와 친해지는 것. 대학생들의 아마추어 스파이 놀이처럼 보이던 이 계획은 뜻하지 않은 일로 무산돼 버린다. 그로부터 4년 뒤 왕치아즈는 항일조직에 본격적으로 가담한 광위민을 만나 이 선생 암살 계획을 듣고는 기꺼이 다시 막부인으로 변신한다.

왕치아즈와 이 선생, 각각의 내면과 서로의 관계는 영화의 제목인 색(色)과 계(戒)가 함축한다. 이 선생은 누구도 믿지 못하는 극도의 경계심 속에 육체적 욕망을 가학적으로 풀어내고, 왕치아즈는 극단적인 자극에 점차 무방비 상태의 포로처럼 돼 간다.

영화의 초점은 이 욕망과 경계심의 균형점이 어떻게 변해 가느냐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항일투쟁의 상황은 이 욕망에 금기를 더하는 조건일 뿐 이 선생이 항일 투사를 고문하는 장면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겉보기에 조용한 신사인 그의 내면이 드러나는 것은 폭력적인 정사 장면을 통해서다. 량차오웨이는 이제까지 스크린에서 쌓아 올린 다감한 이미지를 한번에 뒤집는 모험을 감내하면서 자칫 피사체에 머물 법한 이 선생의 캐릭터에 깊이를 불어넣는다.

다시 말해 ‘색, 계’는 여주인공의 관점이 지배적인 영화다. 오디션을 통해 1만여 명 가운데 뽑혔다는 신인 탕웨이는 타고난 재능이든, 감독의 조련 덕분이든 칭찬할 만한 연기를 보여 준다. 소녀와 귀부인, 순수한 열정과 절망적 욕망을 오가는 다층적인 얼굴이 특히 돋보인다. 영화의 귀결점은 말로 옮기면 뻔하게 들린다. 몸이 섞이니 마음도 섞이고, 연기는 어느새 실제가 된다. 이 뻔한 얘기를 감독 리안은 눈으로 보여 주고, 음악으로 들려주면서 긴장감 넘치는 감정의 드라마로 증축해 낸다.

대만에서 나고 자란 리안의 영화 행보는 각각의 영화 못지 않게 흥미롭다. 제인 오스틴의 고전이 원작인 ‘센스 앤드 센서빌리티’, 지극히 미국적인 정서의 ‘아이스 스톰’ ‘브로크백 마운틴’ 같은 서양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펼치다가 다시 ‘와호장룡’ ‘색, 계’ 같은 중국어 영화를 내놓는다.

동서를 넘나드는 드문 역량을 지닌 이 감독은 동시에 문화권에 따라 반응이 엇갈릴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탕웨이는 촬영 현장에서 세밀하게 연기를 지도하는 감독의 별명이 ‘교장선생님’이라고 소개했다. 리안의 아버지는 실제 교장선생님이었다. 그런 도덕관념을 작심하고 거스르려는 듯, ‘색, 계’의 정사 장면은 그의 영화로는 전례 없이 적나라한 수준이다. 8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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