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4. 말대꾸 하는 학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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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학교 입학 직후의 필자.

경기중학교 선생님들은 나를 골칫거리로 생각했다. 한 번은 물리 선생님이 숙제를 내줬다. 뜨거운 물에 빈 병을 거꾸로 넣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아오라는 것이었다. 실험을 해오거나 추리를 해오면 됐다. 다음 번 물리 시간에 한 학생이 일어났다. “병 속에 있는 공기가 열을 받아 팽창하기 때문에 공기가 병 속에 있을 수가 없고 물방울이 생길 것 같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선생님은 “맞다. 잘 생각해왔다”라고 한 뒤 다음 문제로 넘어가려고 했다.

순간 내가 손을 들고 일어났다. “선생님, 그렇지 않습니다.” 교실 안은 순간 잠잠해졌다. “지금이 국어 시간이라면 그 답변이 맞겠지만 지금은 물리 시간이 아닙니까.” 교실 안에는 더욱 알 수 없는 공기가 흘렀다. “물리에서 빈 병이라고 하는 것은 진공병을 뜻해야 정확합니다. 공기가 있는 병은 물리 시간에는 빈 병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불쾌한 마음으로 집에 와서 교장실로 전화를 했다. “학교가 과학을 가르치려면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교장 선생님은 “내일 내 방으로 좀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서울대 사학과 교수에서 경기중학교로 옮겨온 김경무 교장 선생님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유명한 사학자였다. 이튿날 교장 선생님은 나를 보고 “네가 황병기냐”라고만 했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했더니 아무 말도 없이 바짝 깎아 까칠까칠한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곡식도 익으면 머리를 숙인단다”라고 말했다. 겸손해야 한다는 이 충고가 어린 나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조용히 지나가는 듯했지만 교무실에서는 이미 난리가 났다. 내 담임이었던 국어 담당 홍제유 선생님은 나를 불러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면서 혼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으므로 부모님을 학교로 모시고 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수업 시간 중에 집에 가 부모님 대신 16살 위의 누나를 데리고 와야 했다.

또 한 번은 국어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 문제가 됐다. 학생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교과서에 실린 이 옛날 이야기는 가난한 배추 장사에 관한 것이었다. 배추를 거의 팔지 못한 사내는 배를 곯고 있을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한 부잣집의 놋대야를 훔치다 발각된다. 우리에게 주려는 교훈은 ‘남의 것을 탐내면 안 된다’는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또 손을 들었다. “책이 틀렸습니다. 배추 장사 자신이 배가 고파 훔친 것도 아니고 식구가 굶고 있어서 훔쳤는데 뭐가 잘못입니까. 그럼 맨손으로 집에 갑니까”라고 호기롭게 지적하면서 “내가 배추 장사였어도 훔쳤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갑자기 교실 안 아이들이 두 패로 갈려 논쟁을 벌였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골치 아팠을 것이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골치 아픈 학생이었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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