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원화절상-물가 파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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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해외여행에 나섰던 회사원 金모(45)씨는 독일에서 희한한 경험을 했다.프랑크푸르트에서 말보로담배를 사기 위해 자판기에 쓰여진 대로 돈을 집어넣었는데 답뱃갑속에 동전이 들어 있었다.처음에는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했으나 마르크환율이 떨어졌기(切上)때문에 미국 담뱃값이 내려 돈을 되돌려주는 것이라는 설명을듣고서야 이해와 함께 놀라움이 앞섰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지만 환율이 달라지면 그 나라의 물건 값도 달라진다.예컨대 우리 돈값이 올라가 美달러에 대한 원貨(화)환율이 떨어지면(원貨절상),우리 제품의 수출 가격은 올라가 어려움을 겪는 반면 수입 품 값은 내려가 국내 소비자들이 「물가 떨어지는 맛」을 봐야 정상이다.그런데도 국내에서 팔리는 수입 제품은 환율이 제아무리 떨어져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묘한 습성에 젖어 있다.수입품이 국내에 들어와 복잡한 유통과정을 이리저리 거치다 보면 절상의 효과는 온데간데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원貨환율이 10% 절상되면 소비자물가는 이론상 1.8%의 인하요인을 갖게 된다.그러나 이제까지 원화 환율절상이 소비자물가를 끌어내리는데 기여한 경험은 거의 없다시피할 정도로 국내유통구조는 환율변동의 효과를 무력화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지난 86~88년 원貨값이 올라 환율이 한창 떨어질 당시에도국내소비자물가는 거의 매년 6~7%의 높은 상승률을 나타냈고 올들어서도 모처럼 원貨가 절상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물가는 오히려 다락같이 오르고 있다.국내에서 판매되는 말보 로담배 한갑이올초에 8백원에서 1천원으로 되레 올라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자체가 수입품이 환율변동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의류.가구등 고가 호화사치품은 더 말할 나위도 없어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에서 수입가구를 취급하는 지오바니점포은 4백만원짜리 이탈리아장롱을 가격변동없이 팔고 있고 미국에서 수입되는 「아드리안느 비타디디」여성용 원피스도 국내백화점 가격이 한벌에19만원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국내 유통구조가 미국.유럽.일본등 선진국에 비해 워낙 낙후돼 있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오는 96년 유통시장이 전면 개방돼 선진국의 첨단업태들이 대거 밀려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도 유통마진만을 챙기는 데 급급한 한계 를 벗어나지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일본등 선진국에서는 물건 값을 파격적으로 낮추는「가격파괴」바람이 불고 있다.
세계 각국의 환율.임금.노동생산성을 전반적으로 검토,좋은 상품을 값싸게 파는 국제분업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도「가격파괴」바람이 불어 신세계백화점이 회원제 창고형 도소매 염가매장인 「프라이스 클럽」을 세워 세계에서 가장 싼 물건만을 모아팔 계획이다.
서구형 디스카운트 스토어로 세워진 E마트(서울 창동)와 2001아웃레트(서울 당산동)는 이미 가격인하의 돌풍을 몰고왔고 마크로코리아등 다국적기업의 도매센터 등이 개점을 눈앞에 두고 있어 가격파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킬 전망이다.
이처럼 선진 업태를 중심으로 가격을 끌어내리는 운동이 국내에전반적으로 확산되면 원화절상이 유통과정에 그대로 투명하게 반영되는 체질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李鍾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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