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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고함(孤喊)] 모두 빛으로 나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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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사육신은 세조 2년(1456년) 음력 6월 8일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그 시신은 버려졌는데 어느 스님이 여섯 사람의 시체를 가져다가 한명회의 압구정이 내려다 보이는 노량진 산 언덕 위에 묻었다. 그 스님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연려실기술’은 적고 있다. 4일 동작구 사육신묘에서 올곧기 그지없었던 무장 유응부에게 헌화하는 도올. [사진=임진권 기자]

지난 목요일(1일) 방송80년 특별기획 드라마 '사육신'이 24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시청률 3~4%를 기록하면서 세인의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했지만, 북한의 배우들이 수.목으로 남한 사람들의 안방을 자유롭게 드나든 이 사건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만 없는 심원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KBS가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에 외주를 주는 형식으로 제작되었기에 '사육신'은 남한 예술가들의 참여가 배제된 온전한 북한의 작품이다. 대본.연출.촬영.연기가 모두 북한의 문화수준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 남측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남한의 몇몇 인기배우나 촬영기사나 극작가의 참여가 있기만 했어도 국민들의 관심은 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어설픈 협조문제로 잡음을 발생시키는 것보다는 아예 북한 사람들의 역량을 정직하게 형량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 또한 문화교류의 초보적 단계로서 보다 정직한 시도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논리로써만 남한 사람들에게 인기 없는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통시적 가치를 묵살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우선 아주 사소한 예지만 '사육신'에 나오는 배우들이 입은 옷이 거의 다 나일론 섬유의 천박한 재질로 이루어졌다. 더구나 비디오 카메라에 번쩍이는 화학섬유의 붉은색은 심하게 번진다. 그런데 붉은 색조가 너무도 많다. 이 한 사실만으로도 화면을 대하는 남한 사람의 눈에 '사육신'은 어설프게 보인다. 대사의 언어도 질박하고 화려하지 않다. 카메라의 시각도 역동성과 입체성을 결여하고 있다. 배우들의 얼굴도 전혀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드라마 줄거리는 역사적 사실에 너무 충실하다. 따라서 역사를 잘 아는 이들에게는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고 역사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한다. 더구나 음모와 반란과 좌절의 역.충신 주제는 '지겨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 동일한 논리적 맥락에서 '태왕사신기'가 40%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해서 그것을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사육신'의 유치함은 역으로 북한 사회가 아직까지 오염되지 않은 어떤 순결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방증할 수도 있다. '사육신'은 어설프기는 하지만 매우 진실한 사극이다. 사실(史實)의 실제적 정황을 꾸밈없이 드러내고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도 사초 속의 인물들의 내면을 진실하게 표출하고 있다. '사육신'의 장면들이 유치하게 보인다면, 드라마가 유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실제적 역사적 상황이 유치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얻는 유치하다는 느낌은 우리의 인식체계가 사실(史實)과 동떨어지게 너무 세련되었다고 하는 불행한 사태를 방증할 뿐이다. 성삼문을 분한 고승용의 연기도 치열하거니와, 세조를 분한 최봉식 또한 악역의 내면적 품격을 드높인 격조 높은 연기를 선사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의의는 북한 드라마에 대한 찬반의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사육신이라고 하는 주제가 이념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 정치사회에까지 대의(大義)의 본질을 우리에게 각성시키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세조라는 인물의 역량과 업적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는 계유정난을 통하여 조선 건국 초기에 형성된 유능한 지식인들을 결국 훈구파로 휘몰아갔다. 왕위를 찬탈하는 그의 역모에 가담할 수 없는 양심가들은 결국 사육신의 정도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찬탈은 조선의 지성계에 절개와 죽음, 아니면 모멸과 비겁을 선사할 뿐이었다. 근원적으로 건강한 상생의 논리를 제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승정원의 기능을 극도로 강화시킨 세조의 상명하달(上命下達)식 강권정치는 조선왕조체제를 근원적으로 불건강하게 만들었다. 김종직-김굉필-조광조 라인의 사림(士林)은 훈구파 척결의 명분을 지니고 등장했지만 그것도 너무 경직된 도덕성만을 강행하여 결국 사색당파에 흐르고 말았다. 결국 진보세력의 모습도 수구보수세력의 불의에 오염되고 마는 것이다. '사육신'이라는 드라마에 나타나는 신숙주의 나약하고 비애로운 모습은 20세기 친일파들의 비겁한 모습과 정확하게 겹친다. 한마디로 현재 우리나라 보수적 성향의 모든 뿌리를 캐어 올라가면 결국 세조의 찬탈로 형성된 훈구파 공신세력에까지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가슴을 통관하는 역사라는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훈구와 진보, 그 어느 진영도 역사의 공과를 독점할 수는 없다면, 지금 우리 민중은 모든 진영이 당당하게 역사의 무대로 진입하는 것을 바랄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거짓으로 높은 인기를 독점할 수는 없다. 노무현의 5년 치세가 우리 사회를 깊게 분열시키고 다원화시켰기 때문에 이미 어떤 통합된 세력의 리더십이란 허구에 속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중앙SUNDAY'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는 이와 같이 외치고 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수근거린 것이 옥상에서 선포될 것이다."(눅 12:2~3, 마 10:26~27).

"어찌하여 등불을 켜서 됫박 속에 덮어 두려느뇨? 누구든지 등불을 등경 위에 얹어두지 않겠느뇨? 그래야 방 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눅 11:33, 마 5:15).

모두 빛으로 나와라! 공명정대하게 걸어라! 대선의 마지막 날까지 타협할 생각 말고 단일화 생각 꿈도 꾸지 말고 걸어라! 분열 속에 탄생된 대통령만이 통합된 권력의 허구적 독점이 없이 새 시대를 앞서갈 수 있는 진정한 리더가 될지니!

도올 김용옥 기자, 사진=임진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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