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외국 대사 눈에 비친 ‘흥미로운’ 한국 정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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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02면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2일 한국 대통령선거에 대해 “매우 흥미롭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같은 말을 주한 영국대사로부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 자체에 어떤 정치적 메시지나 감정이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소 불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대선이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허인 것은 사실입니다. 제3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흥미로운 볼거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치에 국가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나라에 사는 국민의 입장에서는 불안하고 창피합니다.

선거란 투표일 하루만의 이벤트가 아닙니다. 선거는 후보를 뽑고, 그들이 선거운동을 하고, 국민적 검증을 받는 모든 과정(process)을 포괄합니다. 당연히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야당인 한나라당 후보가 확정된 것이 지난 8월이고, 여당인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확정된 것이 10월입니다. 그리고 불과 대선 한 달여 남은 현 시점에서 새로운 무소속 후보(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등장하려고 합니다. 이 전 총재는 자신이 만든, 자신이 소속된 정당인 한나라당에서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상적인 정치 과정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물론 남들 보기에 흥미롭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래서 이 전 총재를 인터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지방으로 잠적해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둔 정치인들이 비장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연출하는 장면의 전형입니다. 대신 그의 측근, 또는 최근 그를 만났던 사람들을 수십 명 찾아 그의 의중이 뭔지를 추적해 봤습니다(6면). 주변의 얘기를 들어볼수록 출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이 전 총재를 인터뷰하지 못해 고민하던 중 낭보가 날아들었습니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3일 오후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백두산 관광 사업을 확정 짓고 귀국했습니다(1면 톱 기사와 12면 인터뷰). 현 회장은 귀국하는 길로 바로 현대상선 사옥으로 달려와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현대를 취재해온 신문·방송 기자 40여 명이 몰렸다고 하네요.

평소 말이 많지 않은 현 회장이 거의 대부분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면서 시종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하니 그 기쁨이 짐작이 됩니다. 사실 현 회장은 지난 10월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최한 오찬장에서 살짝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김 위원장이 현 회장을 보면서 “앞으로 백두산 들쭉술 마시고 싶은 사람은 현 회장에게 잘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 순간 백두산 관광사업은 확정된 셈이죠. 북한 측의 태도로 보아 지금까지의 혼선과 달리 앞으로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 회장 개인의 감동을 떠나 백두산 관광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입장료를 내는 것이 퍼주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남북 간의 교류 확대라는 큰 차원에서, 어차피 치러야 할 통일 비용이라고 보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물론 백두산 관광이 순항한다고 해서 남북 관계에 큰 변화가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른 정상회담 합의 사항의 실현 가능성과도 별 관계가 없습니다. 어차피 큰 변화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에 달렸다고 봐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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