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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환생한 21세기 학자의 40세기 'SF 오디세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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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순간이동과 나노테크놀러지가 일상화된 40세기 인류는 화성으로 모험의 길을 떠난다.

일리움
댄시 먼즈 글,
유인선 옮김,
베가북스
960쪽, 2만8000원

서울에 살면서 밤하늘에 별들 보기가 힘들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화성은 맑은 날이면 눈에 잘 띈다. 그 붉은 빛을 보면 30여년 전 바이킹 탐사선이 찍어 보내 온 화성 표면의 황량한 황토빛 풍경이 떠오른다. 저기에 사람들이 가서 정착하고 살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이 책은 먼 미래에 화성에서 재현되는 ‘일리아드’ 서사, 즉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략과정을 둘러싼 초현실적인 SF소설이다. ‘초현실’이란 표현은 지금과는 이질적인 미래 인류, 사람도 기계도 아닌 지적생명체,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 등등으로 야기되는 인지적 혼란을 한 마디로 가름하려는 것이다. (아서 클라크는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별이 안 된다”고 했다.)

21세기의 신화학자였던 호켄베리는 ‘신’들에게 부름을 받아 환생한 뒤 화성판 트로이 전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임무를 받지만, 이내 숱한 음모와 비밀의 한 복판에 놓인다. 한편 순간이동과 나노테크놀러지가 일상화된 40세기의 지구에선 ‘승천’으로 이어지는 평범한 삶을 거부한 한 인물이 모험의 길을 떠난다. 세 번째 설정은 오래 전 인류가 우주로 보낸 인공생명체인 모라벡이라는 흥미로운 존재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인간도 기계도 아니지만 지적 생명체로서 셰익스피어나 프루스트에 탐닉하기도 한다. 목성의 달에 살던 모라벡들은 태양계 안쪽에서 감지된 이상 신호를 조사하고자 화성으로 날아갔다가 신화 속의 존재들과 대면한다. 물론 이 각각의 스토리라인들은 하나로 합류하게 된다.

작가 댄 시먼즈는 현대 미국SF계를 대표하는 간판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일리움』처럼 고전과 결합시킨 SF인 『칼리의 노래』나 『하이페리온』등으로 성가를 높여왔다. 다수의 SF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호러나 판타지 소설도 집필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 ‘고전 신화 서사와 SF형식의 직접적 결합’이 주목을 끈 것은 1993년에 출간된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가 계기였다. 원작 발표 26년 만에 한국어판으로도 선을 보였던 이 소설은 머나먼 미래에 외계 행성을 식민지화한 인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야기 구조나 인명 등은 힌두 신화 체계를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다. 붓다와 비슷한 캐릭터의 주인공, 니르바나에 이르는 여정, 칼키를 비롯한 힌두 신화 속 신들의 전쟁, 반복되는 우파니샤드의 인용 등. 당시 이 작품은 컬트적인 인기를 끌며 적잖은 젤라즈니 팬들을 탄생시켰다. 솔직히 『일리움』이 비슷한 주목을 받기는 좀 힘겨워 보인다. 이야기의 완결이 후속작 『올림포스』에서나 이뤄질 만큼 너무 방대한 내용을 담았다는 점이 핸디캡이다.

그러나 저열한 ‘판협지’들이 난무하는 한국의 활극SF 창작계에는 묵직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충분한 자극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최근 ‘이야기의 빈곤’이 운위되고 있는 우리나라 주류문학계에서도 분명 진지하게 검토해볼 만한 방법론이 될 것이다.

박상준 <월간 ‘판타스틱’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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