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레저] 벼룩만 빼고 다 있는 벼룩시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글·사진=여행작가 채지형 www.traveldesigner.co.kr

 엄청난 크기, 엄청난 인파

 라스트로 시장이 문을 여는 것은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 운 좋게 토요일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다음날 오전 시내를 둘러보고 오후에 라스트로에 가겠다고 하니, 스페인 친구 데이비드가 서두르란다. “오후 2시면 문을 닫으니 일찍 가면 일찍 갈수록 좋다”는 것이다.

 아차, 깜빡하고 있었다. 이곳은 스페인이다. 한낮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지중해의 땅. 오후 2시면 꿀맛 같은 낮잠, 시에스타 시간이다.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려는 스페인 사람들의 고집은 벼룩시장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데이비드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침 일찍 라스트로로 향했다. 시장에 도착하니 오전 9시. 새벽 2~3시까지 왁자지껄하게 금요일 밤의 열기를 즐기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오전 9시면 꽤 이른 시간이다. 하지만 라스트로엔 이미 바둑판처럼 좌판이 깔려 있고, 골목은 인파로 넘쳐났다. 벼룩이라도 된 듯 전 세계 벼룩시장을 뒤지고 다녔지만 이렇게 큰 규모는 처음 본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다는 오전 11시쯤이 되자 가만히 있어도 이리저리 사람에게 떠밀려 다닌다. 서울의 만원 지하철이라도 탄 듯한 기분이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밀려다니면서도 마음은 아주 편하다는 것. 런던 포토벨로 벼룩시장에 갔을 때와는 대조적이다. 콧대 높은 영국인들 사이에서 이방인으로서 느껴야 했던 소외감. 이곳에선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 라스트로 벼룩시장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라스트로엔 스페인 사람들이 쓰던 것들 외에, 국경 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물건이 많다. 모로코에서 온 봉고,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는 우산, 화려한 인도산 전등….

 그뿐이랴. 당장이라도 집에 데려가고 싶은 앙증맞은 강아지에 형형색색 앵무새까지 있다.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시장이다. 밖을 향해 열려 있는 문화적 다양성 덕분에 처음 찾은 사람조차 아무런 이질감 없이 그 안에 녹아들 수 있는 것이다.

 골목 골목 개성 만점

 라스트로는 골목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품고 있다. 예를 들어 산 카예타노 거리(Calle San Cayetano)에는 화가들의 그림이 주로 걸려 있고, 플라자 델 헤네랄 바라 델 레이(Plaza del General Vara del ey)에는 구제품, 로다스(Calle Rodas) 거리엔 골동품 가게가 삼삼오오 모여 있다. 반면 이에 리베라 데 쿠트리도레스(Calle de Ribera de Cutridores) 거리와 로스 엠바하도레스(Calle de los Embajadores) 거리 사이엔 다양한 물건이 섞여 있다.

 오만가지 물건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당장 쓰레기통에 들어가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옛 물건들이다. 주인은 애써 골동품이라고 우길지 몰라도, 사는 사람 입장에선 거저 줘도 그다지 반갑지 않을 것이 대부분이다. 풀풀 곰팡내를 풍기면서 위풍당당하게 좌판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주인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런 걸 왜 파느냐고, 도대체 얼마에 파느냐고.

 남자들은 주로 수십 가지 종류의 칼, 여자들은 빈티지 장신구와 인형에 넋을 잃는다. 플라멩코 포스터를 파는 노점상에도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경쾌한 플라멩코 음악에 화려한 의상, 신발도 있는데 왜 유독 포스터일까? 혹 오랜 플라멩코의 로망을 간직하는 데 포스터가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지.

 가격은 소품의 경우 대부분 2~10유로 사이다. 정말 비싼 몇몇을 빼곤 대부분 그 선에서 다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철저히 주관적인 가격이다. 파는 이의 마음 가는 대로 값이 정해진다. 이 때문에 흥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족히 몇 년은 묵어 보이는 인형 하나를 놓고 한참 밀고 당기기를 하다 보면, 여기가 서울 동대문인지 스페인 마드리드인지 도통 헷갈린다.

 라스트로에서 쇼핑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소매치기도 위세를 떨친다. 오죽하면 라스트로를 ‘도둑들의 시장’이라고 할까.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시장에 오듯, 소매치기는 사람들의 지갑을 쇼핑하러 라스트로에 온다. 그들의 ‘쇼핑 리스트’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야말로 ‘라스트로 백배 즐기기’의 첫 번째 조건이다.

■쇼핑 노하우

1. 일찍 가자. 괜히 여유를 부리다간 인파에 떠밀려 다니다 제대로 구경 못할 수 있다.

2. 고급스러운 골동품은 기대하지 말자. 세상의 다양성을 맛보고 싶은 사람들에겐 ‘강추’, 지저분한 것을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비추’다.

3. 가죽· 공예품 값이 저렴하다.

4. 소매치기가 많다. 특히 카메라 조심! 미리 잔돈을 준비해 가자.

■여행 정보=6월부터 대한항공이 인천~마드리드 간 직항 편을 운항하고 있다. 비행시간은 약 13시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나 프랑스 파리 등 유럽 내 다른 도시를 통해 들어갈 수도 있다. 시차는 한국이 7시간 빠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