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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91.李載灐의장 6共에밉보인 5共얼굴마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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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황태자 朴哲彦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국내외 정치를 요리하던 시절이니 금배지를 확실히 보장하는 전국구의원 공천이 그의 주위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당연하다.
당시 朴보좌관은 주위에『전국구의원감 누구 없느냐.좋은 사람 있으면 추천좀 해달라』며 사람을 구하고 다녔다.그 과정에서 자연히 朴보좌관과 친한 사람들이 자천.타천으로 물망에 오를 수밖에 없다.
무명의 전국구 최연소 후보인 姜在涉검사와 李在晃사장이 가장 대표적 행운아들이다.朴보좌관의 힘은「무명+최연소」라는 사실 외에 이들의 순번에서도 확인된다.姜검사는 32번,李사장은 35번.당시 선거법은 무조건 제1당에 전국구 의석의 절 반(38석)을 먼저 배정해주게 만들어져 있었다.다시말해 38번까지는「무조건」당선되는 당선확정권이다.
朴보좌관의 참모장격이었던 姜의원은 朴보좌관의 경북고.서울大법대 후배.朴보좌관이 5共초 청와대비서실로 들어가면서 같이 일할똑똑한 후배로 가장 믿을만한 동문 姜검사를 스카우트했다.姜검사는 동문 사이에서 알려진 준재였다.
이후 朴보좌관은 姜검사를 꼭 데리고 다녔다.85년 청와대비서관에서 안기부특보로 자리를 옮길때 姜검사는 검찰로의 복귀를 희망했으나 朴보좌관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결국 姜검사는 朴哲彦팀의 연구실장이라는 2인자로 월계수회를 조직하고 대통령선거를 치러냈다.
그러나 姜검사는 개인적으로 이미 검찰로 돌아갈 適期를 놓쳐버렸다.검사의 경우 예외없이 검찰로 돌아가 검찰총장이 되어보는게꿈이게 마련인데 姜검사의 경우 이미 보수적인 검찰사회에서「정치검사」로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朴보좌관과 함께 본격적으로 정치에의 길로 나선 것이다.
姜검사는 당시 별로 연조가 높지 않은 부장검사급에 불과했다.
통상 전국구의원이라면 검사장급 이상,그것도 여권에서 대우해주는경우에나 시켜주는 감투였던게 관례니 姜검사의 전국구 당선은 일러도 너무 일렀다.그러나 전혀 어렵지는 않았다.
姜검사는 공천작업이 한창이던 88년 봄 경북고 동기동창인 李在晃사장의 전국구 진출 희망을 들었다.친구인 李사장은 姜검사가월계수회로 끌어들인 정치지망생.동갑인 그로부터『朴보좌관에게 전국구 국회의원 자리 좀 부탁해달라』는 얘기를 듣 고는『나도 국회의원 못할 것 없잖아』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그는 朴보좌관을 만나 자신과 李사장의 전국구 공천을 요청했다.朴보좌관은『姜검사가 해달라면 안해줄 수 있나』라며 가볍게 금배지 두개를 약속했다.「관례」고「연조」고 하는 말들 도 朴보좌관의 힘 앞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이렇게 월계수그룹이 전국구로 진입함에 따라 그들의 자리를 위해 물러나야하는 불운한 그룹도 있어야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李載灐前국회의장이 가장 대표적 경우로 꼽힌다.씁쓸하게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老정객의 정치역정 마감記는 盧泰愚대통령 특유의 우회적 일처리로 주목된다.
民正黨의 전국구 공천 발표 4일전인 88년 4월8일.공천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던 蔡汶植대표는 밤 늦은 시간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雲耕(李前의장의 아호)선생 잘 아시죠.』 盧대통령은 특유의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30년전 야당정치인 시절부터 그와 친했던 蔡의장이다.당연히 『예』라고 답하자 盧대통령은『내일 한번만나주실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은뒤『부탁말씀이 있습니다』고 정중히 말했다.
蔡의장은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달라는 것인지 물었다.
盧대통령은 딱 부러지게 뭐라 말하지 않고 그냥 『대표께서 다알고 계시는 얘기입니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蔡대표는 전국구 공천에 정가의 관심이 집중된 시기였기에 당연히 공천얘기이리라 짐작은 할수 있었다.5共들어 전국구의원을 연임한 李의장은 이번에도 전국구 재공천을 희망하고 있었다.그러나5共 정치스승의 공천은 불확실했다.
제헌의원이었던 李의장은 야당인 新民黨의 중진으로 활동하다 71년 新民黨을 「위장야당」이라 비판하고 정계를 떠난 원로.신군부는 꼬장꼬장한 그의 이미지를 차용하고자 三顧草廬,그를 5共 民正黨의 간판으로 모셨던 것이다.
하지만 직선대통령.민주정부임을 자부하는 6共 입장에서 간선대통령.군사정권의 몸치장에 이용됐던 老정객은 떨쳐버리고싶은 5共유물이 아닐수 없었다.더욱이 李의장은 괘씸죄 혐의까지 있었다.
그는 대선의 최대 승부처로 여권에 총동원령이 내 렸던 87년 12.12 여의도 유세 당시「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의장공관에 누워 코앞의 유세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李의장이 뒤늦게 공천을 앞두고 노구를 이끌고 지구당 행사에 열심히 참석해 치사 하는등 의욕을 보였지만 이미 그의 공천탈락은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한 蔡대표는 盧대통령으로부터 분명한 可否의사를 듣고자 계속 물었다.그러자 盧대통령은 마지못한듯 대답했다.그것도 아주 우회적으로.
『雲耕선생이 면담을 요청해 내일 아침 9시에 일정이 잡혀있습니다.그런데 면담 오실 필요없다고 좀 전해주십시오.면담해봤자 괜히 서로 입장만 난처해질 거니까….』 蔡대표는 비로소 李의장이 공천과 관련해 盧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한 사실을 알았고,盧대통령이 이미 공천에서 탈락시키기로 결정한 李의장과의 면담이 거북스러워 탈락사실을 통보하기로 결심했음을 알았다.
蔡대표는 곧바로 李의장에게 전화를 했다.李의장의 목소리는 밝았다. 『又癡(蔡대표의 호),이렇게 늦은 시간에 웬 전화를 다주셨소.』 蔡대표는 뭐라고 말문을 꺼내기가 어려워 일단『내일 아침에 찾아뵐테니 커피나 한 잔 주십시오』라고 방문의사만 밝혔다. 李의장은 무척 망설이는듯 했다.그리고는『내가 내일 아침 긴한 약속이 있어 일찍 나가야 하는데…』라고 말했다.그는 盧대통령과의 청와대 면담약속 때문에 곤란해하는듯 했다.
蔡대표는『내일 아침 약속 저도 알고 있습니다』고 말한뒤『그 전에 일찍 갈테니 커피 한 잔만 주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끊었다. 다음날 9일은 토요일이었다.아침 8시쯤 의장공관을 찾아가자 李의장은 반갑게 맞아주었다.그는 이미 청와대 면담을 위한 외출채비를 마친듯 말끔한 정장에 넥타이까지 단정히 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본 蔡대표는 입을 떼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청와대에 올라가실 필요 없게 됐습니다.』 蔡대표가 어렵게 한마디 하자 李의장은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이오.누가 그런 소리를 하는거요.』 蔡대표는 마지막으로 나지막하게 한마디했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老정객은 더이상 말이 없었다.40년 인연을 맺어온 정계를 이렇게 떠났다.
사실 6共에서 李의장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은 일찌감치 정해져있었기에 그의 은퇴 역시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봐야한다.그를 대신한 6共의 정치스승은 바로 朴浚圭.金在淳씨등 3공화국 여당사람들이었다.
朴前국회의장은 盧대통령과 동향인 동시에 경북고등학교 선배로 TK들 사이에서는 학식(서울대정치학교수)과 경륜(공화당의장서리)을 갖춘 대표적 인물.특히 그는 5共 출범과 함께 정치규제에묶여 정계를 떠났다는「5공 피해자」이미지에다 ■ 론등에 정치칼럼을 기고해온 영향력등으로 87년 대통령선거 당시 대구.경북지역에서 적지않은 득표력이 있었다.
***깜짝쇼 계획 물거품 이를 먼저 포착한 인물은 金泳三 民主黨후보였다.그는 60년대초 같이 여당을 했던 인연을 이용해 朴前의장을 포섭,대구지역 유세장에서 그와 나란히 손을 드는「깜짝쇼」를 계획하고 있었다.이같은 첩보를 접한 盧후보가「텃밭을 빼앗길 수 없 다」며 뒤늦게 TK 원로정객이자 朴前의장과 처남.매부지간인 白南檍前공화당의장등을 찾아가 그의 YS行을 막아달라고 매달렸고,朴前의장은 마지막 순간 YS와의 약속을 어기고 盧후보진영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金泳三후보에게는 악몽이었겠지만 盧泰愚후보에게는 천만다행이 아닐수 없었다.당연히 朴前의장은 공천을 확정한 최종 청와대회의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공천을 받을수 있었다.이어 당 중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대표에 임명됐고,대표직을 떠나면 서 국회의장을 지냈다.
金前의장은 朴前의장과 막역한데다 盧대통령의 참모인 崔秉烈정무수석과도 절친한 사이.그는 특히 盧대통령 당선 직후『광주문제해결의 총대를 메달라』는 특명을 받고 민주화합추진위원회 제2분과(광주문제를 다룬 분과)위원으로 참여,폭발성 높은 광주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회의분위기를 가라앉히는등 보이지않게 감속제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5共 인물인 廉普鉉前서울시장이 갈고닦은 지역구(철원)에서 廉씨를 밀어내고 공천을 받아 당선된뒤 6共 전반 국회의장을 지냈다.
묘하게도 朴.金 두 전직 국회의장은 YS정부 출범과 함께 재산공개파동으로 정계에서 불명예 은퇴했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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