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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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엄마는 나를 앉혀놓고 난리를 치다가 갑자기 미국의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어.물론 내가 보는 앞에서 말이지.여기가 밤이었으니까 미국은 새벽이었을 거야.아빠가 웬일이냐고 그랬나 봐.
갈보같은 당신 딸년 때문에 전화를 건 거라고 엄마가 송화구에대고 악을 썼어.난 이년 더 못데리고 살아.빨리 안데려가면 내쫓아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그런 거 난 몰라.다 애비 닮아서그런거겠지.당신이 언제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는 지 나한테 말해본 적 있어.… 그 옆에 있는 계집애가 뭐라구 그러는 거야 집안 일이니까 입 닥치구 있으라구 해.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한달 반 뒤에 난 미국으로 갔어.갔다기보다는…그러니까 우편물을 부치듯이 날 미국으로 부친거야.엄마가김포공항까지 나와서 날 항공편으로 부쳤구 아빠가 LA국제공항에나와서 날 찾았어.
그때부터 미국에 살게 된거지.아빠와 아빠의 여자친구와 나 이렇게 셋이서 같이 살았어.여자는 지니라는 이름이었는데 서른살쯤됐을까,나하고 친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니었던 것 같아.아빠는 자주 출장을 가서 집을 비웠지만,그러면 지니하고 나하고는 서로 크게 참견하지 않고 그런대로 잘 살았어.
나는 우선 아빠가 하라는대로 코리아타운에 있는 영어학원 같은데에 다녔지.거기 가면 내 또래들의 한국아이들이 많아서 미국같지가 않았어.거기 오는 아이들은 대개 나처럼 영어를 못했거든.
사실 거기서는 영어가 필요하지도 않았어.조기유학이 라는 거 들어봤지.한국에서 싹수가 보이지 않는 부잣집 애들을 일찍 미국에보내는거 말이야.
거기 오는 아이들 중에는 미국에 혼자 와있는 아이들도 많았어.어떤 아파트에 가보면 자기들끼리 모여서 그냥 사는 거야.공부?글쎄,나하고 친하게 지낸 아이들 중에는 공부하는거 열심히 하는 애들은 거의 없었어.영어?언제 영어를 써볼 기 회도 잘 없었는 걸 뭐.어쨌든 거긴 아주 웃기는 데였다니까.서울의 날라리들만 따로 모아놓은데 같았다니까.
서울에 있을 때는 본드라는걸 해본적이 있거든.너두 해봤어?그래?아냐 난 너 보다는 더 많이 해봤어.어쨌든 거기서는 마리화나라는 걸 많이들 했어.노는 시간에도 학원 옆골목에 모여서 마리화나를 돌려가며 먹는 거야.아니지.피우는 건데 그걸 먹는다구그러는 거야.
처음에 그걸 먹었을 때는 어떻게 웃음이 나오는지 혼났어.웃음이 그쳐지지가 않는거야.세상의 모든 일이 갑자기 다 너무나 우습게 보이는 거야.아마 몇시간을 계속해서 웃었을 거야.수업시간에 들어갔는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중간에 혼 자 밖으로 나와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낄낄거리고 있었어.모르겠어.처음엔 왜 그렇게 웃음이 났는지….
거기 아이들 하고 친한 다음에는 말이야,아빠가 출장을 가면 집에 가지않고 다른 아이들의 아파트에 가서 자는 거야.집에 지니하고 둘이서만 있기 싫어서라고 하면 아빠도 뭐라구 그러지 못하더라니까.지니는 나쁜 여자가 아니었지만,그냥 내 가 아빠의 약점을 이용한거지.어쨌든 뭐 그런 셈이었어.
아이들끼리 모여 사는 아파트에 가면 가디언이라는 사람이 대개한사람씩 있는데,가디언이란게 뭐냐믄,미국에 혼자 와 있는 아이들을 돌봐주기로 하고 돈을 받는 한국사람 어른이거든.그런데 아이들은 아무도 가디언을 무서워하지 않았어.정 귀 찮게 굴면 다른데로 가겠다고 하면 그만인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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