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맛까지 바꾸는 지구 온난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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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29면

병 바닥에 가라앉은 침전물을 제거하고, 공기와 접촉시켜 향과 맛을 숙성시키는 디캔팅 과정.

알고 있는 독자도 있겠지만 우리 남매는 10월 15일부터 이틀간 오랜만에 서울을 방문했다. 워커힐이라는 멋진 호텔의 야외 뜰에서 신의 물방울과 와인에 대해 남동생과 함께 강연을 한 것이다. 여전히 술이 알큰하게 오르는 가운데 하는 강연이었지만 참석한 분들로부터 “즐거웠다”는 말을 들어 무척 기뻤다. 또한 이벤트 관계자와 내방객 등 많은 한국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여러모로 수확 있는 방한이었다.

이번 강연은 이맘때면 호텔 마당이 단풍으로 곱게 물든다고 해서 우리 남매는 ‘깊어지는 가을’을 주제로 이야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단풍은 아직 보이지 않고, 쨍쨍한 태양이 내리비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파릇파릇한 초록 정원에는 깊어지는 가을은 고사하고 더운 여름의 끝자락이 펼쳐져 있어서 테이블에 놓인 와인이 자외선에 변질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했다.

바야흐로 남극과 북극에서는 빙산이 녹아 얼음 위에서 생활하는 북극곰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2003년에 프랑스는 사망자가 속출할 정도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이로 인해 원래 시원해야 할 부르고뉴 지방도 내리쬐는 햇볕에 고전했다.

부르고뉴에서 자라는 포도 품종 피노 누아는 섬세하고 열에 약하다. 많은 포도밭에서 피노 누아가 태양에 수분을 빼앗겼고, 그로 인해 부르고뉴 와인은 생산량이 격감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포도로 만든 와인은 하나같이 산이 적고 유난히 단맛이 강하다. 뚜렷한 신맛은 부르고뉴 와인의 뼈대와 같은 것으로, 이게 없으면 숙성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풍부하고 진한 과일 맛을 좋아하는(?) 평론가 로버트 파커 Jr.가 “2003년은 흉작이지만 이것은 걸작이다”라고 평가한 도메인의 와인도 마셔봤지만 남방계 와인 같은 맛이 나서 딱히 감흥이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2003년 보르도의 강 왼쪽은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이 잘 자라 그레이트 빈티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해에 만든 와인들을 지금 마시면 강렬한 타닌과 튀는 듯한 과일 맛에 압도되고 말지만, 30년 뒤에는 훌륭한 맛을 내는 걸출한 와인이 될 것이라고 한다.

파커가 이 해에 생산된 와인들에 일제히 높은 평가를 매긴 만큼, 예년의 보르도에 비해 상당히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이 ‘위대함’에 찬동할 수가 없다. 물론 타닌과 과일 맛은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지만, 본디 와인에 있어야 할 섬세함과 우아함이 지나치게 힘찬 면에 눌려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이다.

앞으로도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면 보르도 와인은 한층 달고 힘이 넘치는 맛이 될 것이고, 부르고뉴 와인은 흉작이 이어질 것이다. 독일의 명산 아이스 와인도 온난화로 인해 포도가 얼지 않아 생산량이 격감하고 있다고 들었다. 지구 온난화를 막지 못하면 와인이라는 문화가 전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힘을 모아 와인에 불어닥칠 위기를 막을 수 없을까. 여름 같은 서울의 가을 뜨락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다. 번역 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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