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고문한 전두환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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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연재소설 ‘욕망의 거리’가 실린 1981년 5월 14일자 중앙일보 지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는 25일 '신군부의 언론통제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엔 중앙일보 연재소설 '욕망의 거리'(작가 한수산) 필화사건이 들어 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1년 5월의 일이다. 5공 정권은 신문소설 내용을 문제 삼아 작가와 소설 게재에 관계된 기자들을 보안사로 끌고가 가혹행위를 했다. 한수산 작가와 권영빈 당시 중앙일보 출판부장, 정규웅 편집위원, 이근성 기자, 박정만 시인 등이 피해자다. 기자들은 출근길에 강제 연행됐으며 한씨는 제주도에서 비행기 편으로 압송됐다.

이 사건은 그간 정확한 동기가 밝혀지지 않았다. 소설의 일부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는 추측이 있었을 뿐이었다.

과거사위는 보안사의 관련 문건을 기무사령부(옛 보안사령부)에서 찾아냈다. 문건과 과거사위 등에 따르면 중앙일보 81년 5월 14일자 소설이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 내용 가운데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 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를 하는 경우, 그 관리는 돌아가는 차 속에서 다 잊을 게 뻔한데도 자기네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보고 들어 주는 게 황공스럽기만 해서 그 관리가 내미는 손을 잡고 수줍게 웃는 얼굴…'이란 대목이 있다.

5월 22일자도 문제가 됐다. 회사 수위를 묘사하면서 '그 꼴 같지 않게 교통 순경의 제복을 닮은 수위 제복을 여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여튼 세상에 남자 놈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 있지. 그 첫째가 제복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서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라는 대목이다.

당시 보안사령부(사령관 노태우)는 이 두 가지 대목에 대해 '각하(전두환)의 탄광촌 순방을 비유하면서 무슨 건의를 하든간에 돌아가는 차 속에서 모두 잊어버린다는 불신감 조성의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군(경).민 간을 은연중 이간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판단했다는 것이 과거사위의 설명이다. 과거사위는 "보안사는 언론계 등에서 정부 비판을 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삼기 위해 한씨와 중앙일보 기자 등을 연행해 고문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는 공개사과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당시 한씨와 중앙일보 기자들이 끌려간 곳은 서울 서빙고동 보안사 대공분실의 지하조사실이었다. 기자들은 무릎까지 물이 차 있는 방에서 옷을 벗긴 채 온몸을 맞았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전기고문과 물고문도 당했다. 보안사 요원들은 2~5일씩 고문과 폭행을 한 뒤 진술조서와 반성문을 받고 이들을 석방했다.

중앙일보 사장을 지낸 권영빈 경기문화재단 대표는 "수건을 얼굴에 덮고 물을 붓는 고문과 열 손가락에 골무를 끼운 뒤 전기를 통하게 하는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말했다.

한수산씨는 보안사령관이었던 노태우씨가 88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했다가 92년께 귀국했다. 박정만 시인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88년 9월 사망했다.

이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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