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할말은하자>20.할말많은 여성들 차별은 서러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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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여자는 무조건 방글방글 웃으며 네 네 그래야돼요.섣불리 부당하다고 말하며 나섰다간 상사 눈밖에 나 괜히 트집잡히고 쫓겨나기도 하지요.』 某대학 전산과를 졸업한뒤 40명규모의 투자자문회사에 취직했던 金美英씨(27).그가 1년4개월의 근무기간중주로 했던 일은 커피나르고 책상닦고 복사하고 타이핑하며 상사의전화연결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퇴직 직전엔 사무실 나무에 물주기,웃분의 은행심부름을비롯해 다른 사람들보다 30분 일찍 출근, 물끓여 보온병에 넣는 일까지 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공채를 통해 당당히 입사했던 金씨의 주업무는 컴퓨터프로그램을 이용해 펀드매니저가 운영한 돈의 수익률을 계산해내는 상당히 전문적인 일.
잡무들을 처리하느라 자신의 본업무를 제때 하지 못한것을 金씨의 무능으로 돌리는 상사에게『나도 다른 남자직원같이 잡무를 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있다』고 말대답(?)을 했던 金씨에게 되돌아 온것은『일 못하는 주제에 말까지 많다』는 질 책과『윗사람말에 반항했고 그래서 충분히 쫓아낼 사유가 된다』는 해고위협이었다. 결국 金씨의「버릇없는 행동」은 사무실에서 공식.비공식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고 곱지 않은 시선은 金씨로 하여금 직장을 옮기게 만든 주요인이 됐다.
『3년 남자후배가 들어왔는데 나보다 자리도 위에 앉고 월급도휠씬 많아요.월급날이면 총무과를 찾아가 항의했더니 월급이 조금씩 오르는 거예요.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돌아온 것은 사사건건 반항하고 말많은 여직원은「밥맛」이라는「낙인」이었지요.』 1천명규모의 수출업체 수출부에 근무하다 대기업 회장 비서실 사보담당자로 옮겨간 申慶淑씨(27.K대 신방과 졸)는『직장을 그만둔다는 각오가 아니면아예 말을 말고 꾹 참고 지내는게 최고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前직장에서 터득한 생존 전략(?)을 체념섞인 어조로 말했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식」의 낡은 전통문화 때문일까? 아직도「여성과 할말」은 한국사회에서 그다지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최근 수다의 사회심리학적 기능을 분석한 『그래,수다로 풀자』란 책을 발간,주목을 끌었던 여■학자 吳淑姬씨는『여성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다만 똑같은 말이라도 여성이하면 불평이나 수다정도로 치부돼버려 정당한 의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개인이 아닌 집단적인 여성의「말」도 도마위에 오르기는 마찬가지다. 〈文敬蘭기자〉 지난 89년10월 동아제약.신도리코등 8개 기업이 신입사원 공개채용때 자격조건을 軍畢 남자로 못박으며아예 여성의 응시자체를 막자 서울지역 여대생대표자 협의회가 중심이 되어 서울지검에 고발한 사건은 취업에서의 성차별에 관한 최초의 공식적이고 집단적인「말」이었다.
재판결과 기업들이 1백만원씩의 벌금을 물어 주장의 정당성은 획득했지만『먼저 실력이나 갖추고 권리를 주장하지』라는 핀잔을 많이 들었다고 당시사건에 참가했던 金모씨(28)는 회고했다.
또 올 5월 여상졸업자 채용때 용모제한을 한 기업이 여성민우회등에 의해집단 고발되고 매스컴에 보도되자 많은 여성들이 갈채를 보낸 반면 남성들은「이왕이면 다홍치마가 아니겠느냐」며 비아냥거렸다고 관계자는 털어놓았다.
『최근엔 남녀고용평등법이니,여성의 사회참여니 하는 말들이 매스컴에 많이 오르내리면서 마치 이제 성차별은 없는 듯한 착각을합니다.그러나 눈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성차별,예컨대 「全 여직원의 비서화」같은 문제는 사소해보이고 일상적이 기때문에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50명규모의 리스회사에 다니는 朴淑賢씨의 말. 93년「대졸 사무직여성의 노동과 좌절」이란 석사학위논문(梨大 여성학과)을 쓴 趙정아씨(27)는 『차별임금이나 승진제한등도 문제지만 이런 문제를 말할 수 없게 하는 폐쇄된 言路가 취업여성들을 더 좌절케하고 평생직장으로 생각지 못하도 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91년 노동부「직종별 임금 실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대졸사무직 여성근로자의 59.6%가 근속 연수 2년 미만.이에비해 남자대졸자의 경우는 26.2%가 5~9년,16.6%가 10년 이상으로 조사됐다.
『이제는 여성의 말에도 귀 기울이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아직도 여성들의 말은 가볍게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많거든요.그리고 우리 여성들도 어떤 방법으로 어떤 통로를 통해 자신들의 할말을 하고 실현시킬 수 있을까 연구해야 합니다.』 올해로 7년경력의 裵美淑씨(33.P호텔근무)의 말은 여성들이 남성위주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방식에 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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