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작 파문 사필귀정…태성씨 생각하면 마음 아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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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경기도 파주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만난 박수근 화백의 장남 성남(60)씨. 그는 “나이가 드니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사진=권근영 기자]


검찰은 가짜 이중섭·박수근 그림 2800여점을 갖고 있던 김용수(69) 한국고서연구회 고문에 대해 23일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또한 이중섭 화백의 차남 이태성씨가 김씨의 사기에 가담해 위작을 유통시켰다고 밝혔다. 2005년 4월 서울 평창동 한백문화재단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아버지의 그림이 맞다”고 이태성씨가 김용수씨와 함께 주장한 지 3년여 만이다. 이날 회견장에는 박수근 화백의 장남 박성남(60)씨도 있었다.

박수근 화백이 1952년 그린 성남(당시 5세)씨. 종이에 유채. 28×21cm.

두 아들은 다른 행보를 걸었다. 당시 호주서 급히 날아와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박성남씨는 김용수씨를 검찰에 고발하며 맞섰다. 아예 21년간의 호주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경기도 파주에 자리잡았다. 23일 경기도 파주의 작은 컨테이너 박스에서 만난 박씨는 검찰의 위작 판정에 대해 “사필귀정”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3년여의 검찰 수사 기간 중 호주의 부인과 이혼하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수천점의 조악한 그림들이 어떻게 진품인 양 둔갑할 수 있었는지, 시스템의 문제가 밝혀져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작업실 겸 집인 이 컨테이너 박스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는다.

-결국 검찰이 2800여점 전부 가짜임을 확인했다.

“말할 수 없이 조악한 그림들이, 말도 안 되는 방대한 숫자로 나왔다. 김용수씨는 서명을 위조한 울긋불긋한 그림을 ‘박수근의 원색시대’, ‘관광상품용 그림’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아버지의 미학, 시대정신, 우리가 살아온 가족사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려 했다.”

-이중섭 화백의 차남 이태성씨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가장 마음아픈 부분이다. 3년전 기자회견장에서 위작을 아버지의 그림이라고 구구히 주장하는 그를 보며 뭔가 협잡에 휘둘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라면 어떨까 자문했다. 진품이라면 그림이, 아버지가 말씀하실테니 굳이 설명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도 발언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저 ‘근대 작가들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만 하고 말았다. 태성씨가 자진해서 밝혀주길 바랬다. 회견 후 이태성씨에게 다가갔다. (울먹이며)일본어밖에 모르는 이씨와 말이 통하지 않아 겨우 통역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라고 말했고 이씨는 ‘또 만나자’고 답했다. 난 그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답을 갖고 시작한 싸움이었는데 3년이나 걸렸다.”

-검찰 수사에 바라는 점은.

“아직 정리될 게 남았다. 난 누구도 감옥에 가길 바라지 않는다. 최근 TV에서 이태성씨가 ‘나는 일본법의 보호받는 일본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봤다. 남들은 ‘아버지를 또 죽이는구나’ 냉소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중섭 선생이 사랑했던 아들이 오죽하면 저럴까’ 싶었다. 화랑·평론·언론·감정협회 등 모두가 제자리를 지켰다면 과연 여기까지 왔을까. 3년간 공권력 낭비할 필요 있었을까. 자정하지 못한 우리 문화계·미술계 리더십이란 뭔가. 위작은 끊임없이 나올 거다. 이번에 어둠의 정체들이 드러나 앞으로 이런 협잡은 승산이 없다는 다짐줄이 돼야 한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해인 66년 서울공고 3학년으로 국전에 입선했다. 공고에서 미술반 활동한 게 그림공부의 전부다. 졸업 후 이화여대 도예과에서 흙 고르고 학생들 작품 말리는 아르바이트 하며 그림 그렸다. 그렇게 해서 연 전시회에 아버지 친구분들이 오셔서 ‘성남이가 요즘 돈독 올라 자기 아버지랑 똑같이 그린다’고 수근거리는 것 듣고 충격받았다. 그저 아버지 그림 질감이 좋아 두텁게 그렸을 뿐 비슷하지도 않았는데. 그뒤로 (아버지처럼)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기법은 쓰지 않았다. 86년에 아이들 교육 등의 이유로 호주에 갔다. 청소부·식당일 등 닥치는대로 했다. 위작 200점 나왔다는 연락 받고 돌아왔다. 아버지 20주기전 끝으로 유족으로서 할 일 다한 줄 알았는데 내가 없어 이런 일 벌어진 것 같아 21년간의 호주 생활 접고 돌아왔다.”

-박수근 화백의 작품이 국내 경매 최고가인 45억원을 기록했다.

“아버지는 소처럼 성실했고 흙처럼 소박했던 분이다. 아버지 그림 속에는 내가 놀던 골목이 있고, 아버지가 배고파 두꺼운 마티에르로 채웠던 광주리가 있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정표같은 따뜻함이 있다. 그림값 억억 하기보다는 왜 박수근·이중섭이 국민화가인지, 그림으로 어떤 시대정신을, 어떤 인간성을 구현했는지가 거론돼야 한다. 호당 몇억만 얘기하며 위작 양산 부채질할 게 아니다. 난 아버지 그림을 돈으로도, 물질로도 생각지 않는다. 그림을 오래도록 남겨 여럿이 봐야 한다는 생각에 공공기관에 모두 기증했다. 아버지 그림이 눈앞에 없어도 나는 다 보인다.”

파주=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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