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자들이 남긴 기록 없어 1년 동안 꼬박꼬박 일기 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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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승수 전 유엔총회 의장(左)이 22일 유엔본부 내 서점에서 사인회를 열고 있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반, 미국 뉴욕 유엔본부 내 식당. 이날로 잡힌 취임식을 앞두고 조찬기도회에서 참석했던 한승수(71) 유엔 총회 의장에게 긴급 메모가 건네졌다. 반기문 당시 의장 비서실장이 전달한 메모엔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세계무역센터가 불타고 있습니다”

 다음 목표는 유엔본부일 거라는 소문이 곧바로 퍼졌다. 사무처 직원과 외교사절 모두가 다투어 유엔본부에서 뛰쳐나갔다. 사상 처음으로 유엔 총회가 무산되면서 의장 취임식도 미뤄졌다.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인 12일 취임식이 거행되긴 했지만 한 전 의장은 임기 내내 일촉즉발의 긴박함 속에서 유엔 총회를 이끌고 나가야 했다.

 현재 유엔 기후변화 특사를 맡고 있는 그는 이 같은 총회 의장 시절의 경험과 비화를 엮은 영문 회고록 ‘9·11의 그림자를 넘어 (Beyond the shadow of 9/11)’을 최근 펴냈다.

 한 전 의장은 “총회 의장 취임을 앞두고 자료를 찾아보니 전임자들이 남겨놓은 기록이 하나도 없어 너무나 막막했다”며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회고록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취임 첫날부터 일기를 썼다. 퇴임시 두툼한 4권 분량이 됐다. 이를 토대로 2004년부터 2년 동안 틈 날 때 마다 회고록을 썼다고 한다.

 이 책에는 9·11 테러 직후 채택된 유엔 총회 결의안을 둘러싼 일화가 자세히 소개됐다. 사건이 터지자 남미 국가들끼리 테러 규탄 성명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한 전 의장과 한국외교관으로 이뤄진 참모들은 유럽·아시아·아프리카·중동 국가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성명서가 중구난방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곧바로 의장 명의의 성명서 작성에 들어가 각 지역 대표 20여명과 상의한 끝에 최종 문안을 이끌어 냈다. 총회 개회 3분 전이었다.

 한 전 의장은 “유엔 가입 10년 만에 한국 외교관들이 중심이 돼 유엔 차원의 성명서 작성을 하는 너무도 감격스러운 경험을 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한 전 의장은 22일 (현지시간) 유엔 본부 내 서점에서 출판기념 사인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반기문 유엔 총장 내외 등 각국 외교관들이 참석했다.

 
유엔본부=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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