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후 뇌출혈, 지병 있어도 공무원은 국가유공자 '특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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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지자체에서 119 신고 접수 업무를 맡았던 A씨(38)는 2004년 3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의 응급진료 기록에는 '소주 2병을 마신 상태'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를 받은 사실이 인정돼 공상(公傷)으로 인정받았다. 유족들은 이를 토대로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해 지난해 말 심사를 통과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음주와 흡연 등 중과실이 인정됐지만, 근무기간(9년)이 충분하고 업무(119 신고 접수) 중 스트레스를 고려해 국가유공자로 등록 처리됐다"고 설명했다.

#2. 김모(73)씨는 1953년 전방에서 폭발물 제거작업을 하다 지뢰가 터지는 바람에 다리에 파편이 박혔다. 그는 전역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리다 결국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고, 2000년엔 장애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서울북부보훈처는 지난해 김씨의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거절했다. 53년 전 진료 기록에 '만성 위염'으로 치료를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대퇴부에 남아 있는 지름 2㎝의 흉터를 보여 줬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행정법원에 소송을 내 승소하고 나서야 유공자로 등록됐다.

스트레스나 지병으로 '공무상 질병(공상)' 판정을 받은 공무원 대부분이 국가유공자로 등록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독립유공자나 작전 중 부상을 입거나 숨진 사람은 입증이 어렵다는 이유로 등록이 좌절되는 경우가 많아 국가유공자 선정에 대한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국가보훈처 통계에 따르면 1년에 200~300명 정도의 공무원이 공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 중에는 스트레스.과로 등으로 간질환.뇌출혈 진단을 받은 행정직 공무원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상 판정 업무를 맡고 있는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의 보상관리팀 관계자는 "공상 판정을 받은 사람은 거의 국가유공자가 된다"고 전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공상 판정을 받고도 유공자 등록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해명했지만 이는 장해등급 판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국가유공자 예우 법률상 공무원이 업무 중 재해를 당해 숨지거나 장해 1~7등급 판정을 받을 경우 국가유공자로 등록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공상 인정을 받은 공무원은 우선 공무원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치료비나 장례비와 보상금을 지급받는다. 또한 공단은 장해 정도에 따라 일정액의 연금도 지급한다. 1등급은 본인 급여의 80%, 2등급은 75%를 받는 식이다. 그리고 공상 공무원이 보훈처의 심사를 통과해 국가유공자로 지정되면, 보상금만 차이 날 뿐 독립유공자 및 무공수훈자들과 동일한 혜택을 받는다. 공상 공무원 본인은 물론 배우자와 자녀에 대해 대학까지 학비가 전액 면제된다. 취업 시에는 가점(본인 10%, 가족 5%)이 부여된다. 부상자는 보훈병원이나 위탁병원에서 무료 진료를 받고 가족에게도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이에 대해 산재 판정을 받은 바 있는 한 근로자는 "산업 역군도 국가 발전에 이바지했으니 국가유공자로 등록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공상 판정을 받은 공무원들에게 우리와 어떤 차이로 국가유공자가 받는 가족 학자금이나 취업 가점의 혜택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를 의미하는 국가유공자와 '공무원의 공상 및 순직'의 범주를 따로 마련해 명칭을 분리해야 하며, 심사와 보상도 엄격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서울대 박효종(국민윤리교육) 교수는 "공무원은 일상적으로 공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며 "공직 수행 중 재해를 당했다고 보상 차원을 넘어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것은 독립유공자 등 다른 보훈 대상자와 비교했을 때 불공정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유영옥(경기대 교수) 한국보훈학회 수석고문은 "미국의 경우 보훈 대상자는 '전쟁에 나가 희생당한 군인'으로 엄격하게 제한한다"며 "공상은 국가유공자와 분리된 제도로 처리되는 것이 학문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옳다"고 지적했다.

강인식.이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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