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미르고원을넘어서>2.가욕관과 돈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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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柳家峽에서 황하를 건너면 서쪽으로 祁連산맥(5천5백47m)과고비사막 사이에 낀 좁고 기다란 길이 있다.길이는 1천㎞.
옛날 隊商들이 낙타를 타고 한달이 걸렸을 길이다.이곳이 실크로드의 목에 해당하는 河西回廊이다.이곳을 지나야 타림분지,나아가 중앙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었다.이 하서회랑의 지배권을 놓고여러 민족이 다투었다.그중 가장 강한 힘을 자랑 한 민족이 기원전 2세기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 기마민족인 흉노였다.
남하하는 흉노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漢은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한의 세력이 신장되면서 만리장성도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 뻗어나갔다.서기 121년 한의 武帝는 2차에 걸쳐 10만의 대군을 하서지방에 파견,흉노를 토벌했다.드디어 한이 하서회랑 전역을 장악한 것이다.
黃海(중국측에서는 渤海)가 내려다 보이는 동쪽끝 山海關에서 시작된 만리장성은 서쪽으로 장장 5천㎞나 뻗어나가 하서회랑이 끝나는 嘉욕關城에서 드디어 끝난다.14세기 明나라 때 축조된 가욕관성은 內城과 外城으로 구분돼 잘 보존되어 있 다.城안에는항상 5천여명의 군대가 상주해 이 성을 지켰다고 한다.
이 성에서 만난 한 중국인은『그 옛날 싸움터에서 다시 돌아오는 병사들이 성벽에 돌을 던져 메아리가 울려 퍼지면 성이 비어있는 것으로 알고 안심하고 들어갔다』고 전해 주었다.
7월15일 가욕관성을 뒤로하고 우리 일행은 버스로 敦煌을 향해 떠났다.서쪽 사막 가운데 점점이 흩어져있는 오아시스에는 차츰 위구르인 마을이 많아진다.위구르인은 코가 크고 눈이 패었으며 이목구비가 분명해 첫 눈에 서양인을 연상케한다 .
길가 곳곳에는 그 옛날 서쪽으로부터 적의 습격을 알리는 신호를 올렸던 봉화대의 잔해가 드문드문 눈에 띈다.
그 당시 이곳에서 올렸던 봉화는 반나절이면 2천㎞나 떨어져 있는 長安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玉門鎭 橋灣城에서 잠시 쉰후 安西.瓜州를 거쳐 오후5시쯤 드디어 敦煌,鳴沙山에 도착했다.강풍으로 침식된 퇴적층이 50m나쌓여 이뤄진 鳴沙山(바람이 불면 가는 모래가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난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짐)밑에서 올려다 보면 마치 높고 낮은 물결이 파도를 이루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동서로 20㎞나 뻗은 이 명사산의 서쪽 끝에는 높이 50m의깎아지른 절벽 위에 수많은 석굴이 있다.이것이 그 유명한 敦煌의 莫高窟이다.
***세계최대의 미술관 남북으로 약 1.8㎞에 걸쳐 4백92개의 석굴에 석굴면적 4만5천평방m,불상 2천개,이들 불상들을옆으로 뉘어 놓는다면 그 길이가 54㎞에 달한다고 한다.
내용에 있어서도 불교미술.역사.풍속.건축.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실로 그 규모에 있어 세계 최대의 畵廊이요,미술관이라 할 수있다.석굴아래로 석굴의 반사된 모습을 담은 당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사미산맥이 우뚝 서있다.
그 옛날 樂준(락준)이란 중이 나무지팡이를 짚고 산에서 내려오니 이곳에 황금빛이 비쳐 첫 동굴을 열었다고 한다.
그때가 서기 366년.이후 唐.宋.元대에 이르는 1천여년간 열렬한 불교신도들에 의해 굴은 계속 축조돼 1천여개에 달해 千佛洞이라 불려지기도 했다.
이중 本尊交脚 미륵보살을 모시고 있는 2백75호 굴은 5세기北魏때 건립된 것으로 현존하는 굴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특히 1900년 慧超스님이 쓴『왕오천축국전』이 나온 17호 굴이 새로 발견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했고 敦惶學이라는 새로운학문이 탄생하게 됐다.
오늘의 막고굴은 실크로드로 인해 이루어진 위대한 문화교류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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