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레저>정읍 갑오농민전쟁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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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기세가 등등한 한낮의 태양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전북 정읍군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 서서 1백년 전에 이곳을 휩쓸었던 농민의함성을 오늘의 것인양 되새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민족 근대사의 커다란 분수령이었던 갑오농민전쟁(1894)발발의 한 원인이 됐던 저수지「萬石洑」의 현장.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趙秉甲이 농민들의 혈세를 거둬들이기 위해 이 평야를 가로지르는 東津江을 막았다가 농민들의 봉기를 불러일으켰던 그 둑은 간 곳이 없고 말라붙을 듯한 강가에는 흰물새(왜가리)가 한가로이 나래짓을 하고 있었다.보지 도,느끼지도못하는 자에게 그 뜨거웠던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듯했다. 결실을 위해 온 힘으로 땡볕에 낟알을 익혀가는 벼포기들이 녹색의 물결인양 바람결에 일렁일 뿐 그 옛날,그 시절을 말해주는 건 오직 요즘 사람들이 세워놓은 생경한 「萬石洑遺址碑」뿐이었다. 龍의 문양이 새겨진 흰 돌머리를 이고 있는 검정색 대리석비는 역사의 세월도,엄청났던 사건도 전해줄 수 없는 생명없는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학인 요즘 아스라히 사라져간 조상의 숨결을 느끼려젊은이들이 줄을 이으니 그것이 우선 가슴에 다가왔고 그들을 이곳으로 오게 한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이 고마웠다.
거기에는 물론 문화유산답사회를 오랫동안 이끌고 최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써 많은 이들에게「우리문화사랑」의「신드롬」을일으킨 兪弘濬 영남大 교수 같은 이가 들어있다.
兪교수가 머리꼭지를 말릴 것같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둑방에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농민전쟁의 의미와 그 기수였던 全琫準의 생애에 대해 긴 시간을 이야기할 때 젊은이들은 심각하게 역사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였던 녹두장군 全琫準.체구가 왜소해 「녹두」라는 별명이 붙은 그의 토방집은 만석보에서 차로 10여분 거리 20여가구가 모여사는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채송화.아주까리.호박밭이 여느 마을처럼 정겨운촌마을 이엉을 얹은 돌담 안 초가삼간에는 조선의 가파른 세월을살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주인을 기리는 객들만 온통 서성이고 있었다.
다섯명의 식솔을 거느린 가장,세 마지기의 전답을 경작했던 소농에 서당훈장이었다는 전봉준의 빛바랜 사진은 형장으로 끌려갈 때의 모습으로 어두운 방안에 걸려 오가는 사람들을 비장한 표정,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효성이 지극한 아들,정 많았던 남편,과묵하고 평범한 가장에서 한시대를 일갈하고 역사의 한章을 뒤바꿔 놓은 반제.반봉건투쟁의 선봉장으로 그가 서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고부군수에게 저항하다 모진 매를 맞고 한달만에 숨진 아버지의죽음 때문이었을까,그의 나이 스무살 남짓까지 계속된 나라의 환란(병인양요.신미양요.외세에 의한 개항등)때문이었을까.한 인간이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시 대적 요청에는어떤 우연과 필연이 작용했을까.
***황토현에 전적기념관 이곳서 동남쪽으로 6㎞거리에는 갑오농민군과 관군이 최초로 접전해 농민군이 대승을 거뒀던 황토현이자리하고 있다.
원통형 화강암 전적비,죽창을 거머쥐고 싸움에 나선 농민들의 모습을 새긴 돌부조,녹두장군의 초상화와 동상을 모신 전적기념관이 황토현 솔밭 언덕 위에서 이곳이 뜨거웠던 격전의 현장이었음을 애써 얘기하려는 듯 했다.
초상화에 그려진 장군의 모습이 표독스런 양반 같다느니,맨상투바람에 두루마기를 걸친 동상과 기념관 유물들이 사실과 다르다는학자들의 지적을 상기하면서 한적하고 말끔한 기념관 경내를 한바퀴 돌아보면 더위도 한풀 잦아든다.
농민군의 핏자국이 서려 있는 듯 유난히 시뻘건 색채를 토해내는 발밑의 황토를 내려다보면서 전봉준이 「즉시 사형」이라는 선고가 떨어지자 분연히 일어나 대갈일성했다는 한마디가 불현듯 떠올랐다. 『正道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하지 않으나 오직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할 따름이다.』 그가 떠난 지(1895년 41세로 작고)1백년.그는「역적」이 아니라 이제민족운동사에 영원한 횃불로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글 高惠蓮기자.사진 崔宰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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