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종전선언’ 미국 분위기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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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호 06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17일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대(對)시리아 핵기술 지원설을 묻는 질문에 즉답을 피한 채 “북한은 핵 불능화와 함께 확산 중단도 약속했다”고 말했다. [워싱턴 AP=연합뉴스]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10월 4일 남북 정상이 이렇게 합의한 이후 한국의 언론과 학계는 남·북·미·중 4자 정상회담의 연내 개최 가능성, 조기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협상 시작 등의 담론에 휩싸였다. 조기 추진에 대한 비판과 희망적 관측이 교차했다. 이는 10·4 선언을 계기로 가능하면 이른 시기에 한반도 평화체제의 초석을 놓으려는 청와대의 움직임과 맞물려 있었다.

한국 대선 영향 줄까 우려 … 속도 조절 모드로

하지만 10·4 합의 2주가 지나면서 차분해지는 분위기다. 관련 당사국인 미국과 중국이 한국에 보조를 맞추지 않고 속도 조절 모드로 들어간 듯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한국의 대선(12월 19일)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종전선언을 조기에 추진하려던 한국의 구상은 벽에 부닥쳤고, 10월 말로 추진해온 6자 외무장관 회담도 연내 성사 여부가 불투명하다. 이 회담이 이뤄지면 4자 외무장관이 별도로 만나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 개시를 선언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의 핵 불능화 및 핵 물질 신고 이행을 지켜본 뒤 다음 단계를 밟자는 미국의 생각은 확고한 것 같다.

◇미국, 종전선언 정상회담에 시큰둥

남북 정상회담 나흘 뒤인 10월 9일. 노무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20분간 이뤄졌다. 통화가 끝난 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노 대통령은 그간 이뤄진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바탕으로 직접 관련 당사국 간 종전선언을 위한 정상회담 추진에 (남북이) 합의했음을 설명했으며, 부시 대통령은 이는 한·미 정상 간 협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으로 환영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 소식통은 “이날 통화에서 노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위한 정상회담의 운을 뗐지만, 부시 대통령은 답을 하지 않은 채 넘어갔다”고 전했다. 사실상 거부였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생각한 종전선언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정상들이 한국전쟁 종전을 먼저 선언하고 평화협정 협상에 들어간다는 구상을 피력했다. 북한의 완전 핵 폐기 전이라도 핵 시설 불능화 등 비핵화 프로세스가 본궤도에 들어가면 정전협정 당사국 정상들이 모여 종전선언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반면 미국은 종전선언은 비핵화의 완료 시점에 이뤄지는 것이고, 평화협정 협상 과정의 끝부분에 나올 수 있는 선언이라는 입장이다. 정상 간 회동은 최종 서명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부시 대통령이 노 대통령에게 “비핵화가 다 되고 나서 우리 셋(김정일 국방위원장 포함)이서 종전선언에 서명하자”고 한 이후 한국은 내부의 평화체제 개념 정립 과정에서 미측과 다른 그림을 그려온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11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이 언급된 것과 관련해 “지금 (평화체제) 협상에 바로 들어가기는 조금 빠른 것 같고, 선언하고 그 다음 가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김 위원장에게) 얘기했다”고 소개했다. 천호선 대변인도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에 들어가기 전 종전선언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며 선언이 평화협정을 빨리 가도록 추동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측은 종선선언을 평화협정의 출발점이 아니라 평화협정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고려하면 한·미 간 간극을 메워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미, 2002년 대선 상황 재연 우려

10월 초 미 백악관은 우리 정부에 자국의 언론 대응 지침(Press Guidance) 문건을 전달했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부시 대통령 면담이 무산된 이후 국내 정치권의 논란이 계속될 때다. 자국의 언론 지침을 상대국에 전달하는 예는 흔치 않다고 한다. 문건은 ‘미국은 어떤 경우든 한국의 국내 정치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 정부 인사들은 2002년 대선 당시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 사고로 숨진 사건이 반미 시위로 증폭돼 이것이 대선의 큰 쟁점이 됐던 것을 이번에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을 사석에서 여러 차례 밝히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 정부가 주도하는 대북 핫이슈에 발을 맞추는 것이 선거 개입으로 비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한 미 대사관 측도 “어떠한 사안도 한국 내 대선에 영향을 미칠 뇌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북한과 미국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북한 핵시설 불능화 협의, 문화·인도적 교류를 통한 상호 신뢰 증진 조치들은 상당히 진지하고 견고해 보인다. 북한-시리아 간 핵 거래설이 제기되는 중에도 미국은 핵 확산 위협의 심각성만 강조할 뿐 북한의 연루 여부에는 답변하지 않고 있다. 워싱턴 타임스는 미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 등 행정부 내 비둘기파가 전·현직 강경파의 6자회담 방해를 차단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6자 외무장관 회담 등 한국과 맞물린 외교 일정은 속도감이 떨어진 분위기다. 한국 정부가 한반도 평화 일정에 드라이브를 거는 데 대한 경계란 해석도 나온다. 톰 케이시 미 국무부 대변인은 최근 한국 정부 안팎의 인사들이 라이스 국무장관의 방북을 촉구하자 “그런 방북 계획은 들어본 바 없다”고 부인하기도 했다.

◇중국, ‘3자’ 언급에 불쾌감

당초 우리 정부의 복안은 북한이 불능화 조치에 착수하면 작업이 완료되기 전이라도 6자 외무장관 회담을 열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불능화 이후 단계인 북핵 폐기 이행표 작성 ▶동북아 평화체제 논의 시작 ▶남·북·미·중 4자 외무장관 간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 개시 선언을 추진해 왔다. 회담을 중국의 17차 당 대회가 끝난 뒤인 이달 말로 추진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6개국 장관의 외교 일정상 함께 모일 수 있는 기간은 다음달 말이다. 하지만 회담 참가국들은 “불능화의 완전한 이행과 핵물질 신고에 당분간 집중하자”는 의견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납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일 외무장관이 만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 외교 소식통은 “중국의 미온적인 태도는 중국 배제 여지를 남긴 언급(남북정상선언에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추진’으로 표현)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일 수 있다”고 말한다. 다음달 말에 이뤄지지 않으면 12월은 더욱 힘들게 된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은 18일 국감에서 평화체제 논의 시작 시기에 대해 “북한이 핵물질(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신고하면 핵물질을 다루게 되는데 그에 따라 평화 과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 것으로 한·미가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케이시 미 국무부 대변인은 18일 “3주 내 불능화 작업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달 중순이 돼야 불능화 작업이 시작된다는 얘기다. 북한이 일반이 기대하는 이상의 속도로 불능화를 이행하고, 핵물질을 신고한다면 연내 6자 외무장관 회담이 열릴 정치적 동력은 생긴다. 이를 계기로 평화협정 협상 개시 선언도 가능하다. 그러나 핵심 당사국인 한국의 대선은 그 추동력을 낮추는 최대의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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