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문화까페] 궁궐여인 잔혹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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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김미정 주연:박진희·윤세아·서영희·임정은·전혜진
장르:스릴러·공포 등급:청소년 관람불가
20자평: 상업영화의 새로운 상상력, 기대에 비하면 절반의 성공

 임금이 사는 궁궐 한쪽에서 궁녀 하나가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궁녀들의 사감선생격인 감찰상궁(김성령)을 비롯, 주위에서는 쉬쉬하며 자살로 덮으려 한다. 검시를 담당한 내의녀 천령(박진희)은 타살 의혹을 강하게 제기한다. 사실 수상쩍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죽은 궁녀와 한방 을 썼던 말 못 하는 궁녀(임정은)도, 시체가 지닌 값비싼 노리개를 남몰래 품에 넣은 궁녀(전혜진)도, 왕족의 물건인 노리개를 지녔던 죽은 궁녀(서영희)도, 심지어 천령 자신도 말 못 할 과거의 비밀이 있는 것이 수상하다. ‘왕의 여자’ 가운데 유일하게 왕자를 낳고도 세자 책봉을 받지 못 해 전전긍긍하는 희빈(윤세아)도 석연치 않다.

 이처럼 영화 ‘궁녀’는 왕실 사극이면서도 왕족이 아니라 낮은 신분의 궁녀들에게 눈높이를 맞췄다. 상업영화로서 새로운 면모다. 이후 이야기에 굽이굽이 고비를 더하는 솜씨나 시각적인 효과 역시 상업영화에 기대할법한 자극을 충족한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려온 관객의 입맛을 당길 만하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아껴두는 편이 좋다. 우선 시작은 스릴러이되 그 추동력은 점차 엷어진다. 내의녀 천령이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는 동안 이를 앞질러 구중궁궐에 첩첩이 쌓여 있던 각종 비밀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정교한 추리극을 밀고 나가 조선왕실판 CSI(과학수사대)가 되는 대신 이 영화는 다른 길을 택한다. ‘왕실 여인 잔혹사’라고나 할까. 왕실의 물건에 손을 댄 자에게 가해지는 고문, 입 밖에 내지 못할 사랑을 극단적인 자해로 표현하는 모습, 입단속을 제대로 못한 궁녀를 시범 삼아 처벌하는 일명 ‘쥐부리글려’ 풍습에 이르기까지, 그 잔혹함은 점증된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혼령의 활약까지 가세하면서 스릴러는 공포물로 장르 전환을 하는 듯 보인다.

 이런 잔혹함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화려한 궁궐이 실은 갖은 욕망으로 뒤틀린 세계라는 전제다. ‘궁녀는 모두 임금의 여자’라는 대사처럼 그 욕망이 나오는 곳도, 바라는 곳도 모두 왕이라는 절대권력이다. 특이하게도 왕의 얼굴은 관객이 기억할 만큼 제대로 카메라에 비춰지지 않는다. 최고 권력자임에도 마치 익명의 존재처럼 그려진다. 연애선수급인 왕의 조카(김남진)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다른 남자 배역도 없다.
 
신인 김미정 감독은 기존의 자료에서 쉬 찾아보기 힘든 소재에 폭넓은 상상력으로 살을 붙여 속칭 ‘센’(강한) 이야기를 데뷔작으로 내놓았다. 그 결말이 브라운관의 궁중사극에서 즐겨 다뤘던 ‘여자들의 암투’로 요약되는 것은 역시나 아쉬운 대목인데, 이런저런 아쉬움은 최근의 국산상업영화에서 모처럼 소재와 표현 모두 대범한 시도를 보여준 미덕으로 갈음하고 싶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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