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노 대통령의 ‘NLL 모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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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그런데 17년이 지나 이 조문을 둘러싸고 역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 3조를 원용, 서해 북방한계선(NLL)이 ‘영토선’이 아니라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한반도 전체가 대한민국 영토인데 또 무슨 영토선이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비교할 수 없는 대상들을 억지로 비교한 논리 비약에 불과하다.

지난 몇 달 동안 이어진 NLL 논란에서의 ‘영토’는 남북이 각기 실효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지역을 의미했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지켜내느냐, 마느냐의 여부였다. 그러나 헌법 3조에 규정된 ‘영토’는 이것과는 그 차원이 다른 내용이다. 실제적인 차원이 아니라 선언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특히 91년 남북한이 각각 독립국가로 유엔에 가입한 이후에는 이런 의미가 더욱 강화됐다. 남북에 각각 실질적인 통치기구가 존재하는 이상 남북 관계의 실제상황에선 적용하기 어려운 조항인 것이다. 노 대통령의 논리대로라면 현 휴전선도 영토선이 아니게 되는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NLL 문제를 다루겠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도 논리가 꼬일 수밖에 없다. 92년 발효된 이 합의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정치 실체가 서로를 인정한 토대 위에서 체결된 것이다. 그런데 헌법 3조를 적용하면 북한의 정치 실체를 인정할 수 없게 되니, 기본합의서 체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결국 노 대통령의 헌법 3조 원용은 ‘NLL이 영토선’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해서든 반박하기 위한 차원에서 끄집어 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논거가 약하고, 무엇보다 논리적 모순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게 문제다. 노 대통령은 북한체제를 가급적 북한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 해 왔다. 북한이 반발한다고 북한의 ‘개혁·개방’이라는 용어까지 쓰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

그랬던 노 대통령이 북한이 가장 탐탁지 않게 보고 있는 우리 헌법 3조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겠다는 인식을 드러냈으니 어리둥절한 것이다. 아마 평양 지도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NLL에 대해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는 듯한 태도는 바람직하긴 하나 ‘북한 땅도 한국 땅’이라는 ‘불순한 인식’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노무현 정권이 아니었다면 격렬한 비난을 쏟아 냈을 북한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정황과 무관치 않다.

남북 정상회담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만큼 우리로선 더욱 용의주도하게 대비해야 한다. 그러려면 해당 분야에서 우리 사회 최고전문가들의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 NLL 문제라면 국제해양법 재판소의 박춘호 재판관이 그런 인사가 아닐까. 이런 전문가 대신 헌법이나 군사전략에 문외한인 코드 맞는 교수들의 얘기나 들으니 사태가 이렇게 꼬이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식 개혁·개방’에 거부감을 표명한 적이 몇 차례 있었는데도, 노 대통령이 불쑥 이 문제를 꺼냈다가 ‘역습’을 당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분야에 대해 정통한 보고를 받지 못한 것이다. 노 대통령에게 발상의 전환을 기대한다면 연목구어(緣木求魚)일까.

안회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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