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금·마케팅 전략까지 정부서 ‘쥐락펴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4면

정보통신부는 지난 3월 통신 사업의 규제를 풀어 시장 경쟁을 촉진하겠다며 ‘통신규제 로드맵’을 내놨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기조가 무너졌다. 지난달 청와대가 “이동통신 요금을 내리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자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에 요금 인하 압력을 넣었다. SK텔레콤은 부랴부랴 ‘망내 할인 요금제’를 내놓았다. 같은 회사의 가입자끼리 통화하는 요금을 깎아주는 이 요금제는 SK텔레콤이 1998년 시행했다가 정부가 못하게 해 없앤 것이다. 1위 사업자에게 가입자들이 몰릴 것이라고 반발한 후발 사업자들의 손을 정부가 들어줬다.

 정통부는 SK텔레콤을 휴대전화 서비스의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규정해 요금을 일일이 간섭한다. 시장지배적 사업자는 요금을 조정할 때 정통부뿐만 아니라 물가 관리를 담당하는 재정경제부와도 협의해야 한다. 이런 상황 아래서 최근 10년 동안 신규 이동통신업체가 나오지 않다 보니 SK텔레콤·KTF·LG텔레콤 등 이동통신 3사는 시장 분점에 안주했다. 이 때문에 매년 국회의 국정감사 전후로 휴대전화 업계가 하는 연례행사가 하나 있다.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인하 요구에 밀려 요금 인하 계획을 풀어 놓는 것이다. 물론 정통부와 조율한다.

 우리 정부가 이처럼 이동통신 시장의 판도를 쥐락펴락하는 것과는 달리 선진국에는 이동통신 사업의 울타리가 없다. 업체가 스스로 요금도 매기고 여러 서비스를 내놓는다. 프랑스·영국·미국 등의 통신 정책 잣대는 소비자 권익 보호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우선 진입 장벽을 낮춰 새 사업자가 많이 나오도록 분위기를 만든다. 프랑스는 최근 신규 이동통신 사업체를 뽑는 중이다. 프랑스엔 3개 이통 사업자와 통신망을 빌려 이동통신 사업을 하는12개의 이동통신망 임차 사업자(MVNO)가 있어 경쟁이 활발한 편인데도 프랑스 통신위원회(ARCEP)는 새 사업자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MVNO의 시장점유율이 3.4%에 그쳐 갈 길이 멀다는 것이다.

 홍콩의 이동통신 요금이 저렴한 것도 여러 업체가 경쟁해 값을 낮췄기 때문이다. 인구가 700만 명밖에 안 되는 홍콩엔 우리나라보다 하나 더 많은 4개(3세대) 이통사가 경쟁 중이다. 홍콩 전신관리국의 천쯔이(陳子儀) 규제사무부문 총감은 “주파수가 허용하는 한 사업자를 많이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통신방송위원회(OFCOM)의 공보담당 사이먼 베이츠는 “선발 사업자건, 후발 사업자건 더 경쟁력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가 살아남는 게 순리”라며 "영국 이통사들은 고객 중심 경영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국내는 어떤가. 통신 방식에 따라 사업자를 선정해 적잖은 후유증을 남긴 사례가 있다. 정통부가 2000년 3세대 사업자를 선정하려고 하자 SK텔레콤·KTF·LG텔레콤 이통 3사는 모두 유럽식 서비스를 원했다. 그러나 LG텔레콤은 유럽식 서비스 사업권을 받지 못했다. 정부 권유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미국식 3세대 서비스를 선택했던 LG텔레콤은 지난해 고심 끝에 3세대 사업권을 반납했다. 전 세계 가입자의 85%가 유럽식 기술을 쓰는 상황에서 미국식 서비스를 해 봐야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3세대 사업자가 모두 유럽식을 택하도록 놔뒀다면 경쟁이 촉발됐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물론 선진국도 소비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규제는 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7월 말 회원국의 해외 로밍(사용 중인 휴대전화를 그대로 들고 해외에서 통화하는 것) 요금 상한제를 시행했다. 다른 요금은 계속 떨어지는데 로밍 요금만큼은 비싸다는 소비자 불만이 많아서다. 로밍은 다른 나라 통신사끼리 계약해야 하는 사안이라 특정 국가 정부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EU 집행위가 나섰다. EU 내에서 휴대전화를 걸 때 내는 요금을 분당 49센트(받을 땐 24센트)를 넘지 못하게 했다. 또 이 상한선도 매년 낮추도록 했다.

 정통부 산하 통신위원회 요금심의위원인 최선규(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는 “정통부가 요금·마케팅 등 사업자들이 경쟁할 요소들을 일일이 규제해 사업자들이 소비자보다 정부 눈치를 더 많이 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시장지배적 사업자=흔히 얘기하는 독과점 업체다. 전기통신사업법에선 시장점유율이 일정한 기준을 넘는 업체는 정보통신부 장관이 요금 등을 인가하도록 정하고 있다. 대상이 되는 통신 업체를 ‘약관 인가 사업자’라고도 한다.

◆특별취재팀=차진용(팀장)·이원호(중국·홍콩), 이나리(일본), 김원배(영국·프랑스·독일), 장정훈(미국)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