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법 달인' 미국 로비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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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미국의 한 자선재단은 최근 기금 모금 파티를 열었다가 곤혹스러운 상황에 부닥쳤다. 기업과 로비스트들이 한 장에 2500달러(약 230만원)나 하는 파티 입장권을 수백 장씩 구입해서는 다시 재단에 기부한 것이다. 대신 이들은 표를 받을 사람들의 명단을 건넸다. 여기에는 의회 의원과 보좌관 10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로비스트들이 직접 입장권을 주면 과도한 선물에 해당하지만 자선재단을 통해 주면 문제가 되지 않는 법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미국에서 정치인들이 로비스트에게 받을 수 있는 선물과 향응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고 있지만 이처럼 허점을 파고드는 로비는 여전하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14일 보도했다.

올여름 미 의회는 로비스트들이 의원들에게 식사와 여행.선물 등을 제공할 수 없도록 한 법을 통과시켰다. 거물 로비스트 잭 아브라모프가 2006년 사기와 불법 로비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의원 3명이 부패 혐의로 투옥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최근 워싱턴의 한 법률 회사에서 '법에 저촉되지 않는 접대 방식'에 관한 세미나를 열자 로비스트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변호사 클레타 미첼은 "새 법은 로비스트들이 식사 대접을 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지만 (의원들의) 술집 청구서를 대신 결제해주는 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고 꼬집었다.

새 법은 의원들이 민간 기업의 전용기를 공짜로 타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대여료를 내면 이용할 수 있어 대여료를 싸게 해 특혜를 줄 수 있다는 허점이 있다.

로비스트들이 1만5000달러 이상을 특정 의원의 선거운동에 기부할 경우 일정 기간마다 신고해야 하지만 남의 명의로 기부하는 것까지는 감시하지 못한다. 기업이 전당대회 기간에 특정 의원을 위한 파티를 열어주는 것도 금했지만 로비스트들이 '친구 모임'이라고 둘러대면 처벌하기 힘들다.

이처럼 모호한 법 적용 때문에 의회 윤리위원회에는 접대 한계를 묻는 의원과 로비스트들의 문의가 최근 몇 달간 1000건 이상 쏟아졌다. 주말 여행과 값비싼 결혼 선물, 다섯 가지 코스 요리 등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의원들이 과거 누리던 특혜를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는 것도 문제다. 최근 미 상원은 기업의 전용기 이용과 관련, 법 발효 이후 60일 동안은 대여료를 꼭 내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했다. 의원들의 교통비 부담이 급격히 늘어나고, 대여료 산정에 시간이 걸린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백일현 기자

☞◆잭 아브라모프=한때 워싱턴 최고의 로비스트로 불렸던 인물이다. 아프리카 가봉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간 정상회담, 인디언들의 카지노 개설권, 회계부정 스캔들에 휘말린 타이코 인터내셔널 등과 관련한 전방위 로비를 벌이다 처벌받았다. 그가 의원들에게 제공한 선물은 선거 후원금, 스포츠 경기 관람권, 취직 알선에서부터 고급 레스토랑 공짜 식사, 부부 골프 여행까지 다양했다. 이와 관련, 10여 명의 거물급 의원이 검찰의 수사를 받았으며, 그 여파로 로비스트들의 활동을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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