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프리즘] 폭력 교실, 이종 격투기…예능 프로그램 '막장화' 너무 심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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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의 주말 예능 프로그램인 ‘이경규ㆍ김용만의 라인업’(이하 라인업)은 처음부터 MBC의 동시간대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을 의식하고 기획한 흔적이 역력하다. 출연자들에게 궂은 일을 강요하는가 하면 다른 출연자에 대한 험담도 유도한다. 막말과 욕설은 기본이다.

‘무한도전’의 박명수를 의식한 캐스팅인 ‘라인업’의 김구라가 그랬다. 13일 방송분(4회)에서 그는 아예 개그맨 선배인 김경민을 향해 ‘×새끼야’라는 욕을 퍼부었다. 물론 제대로 된 욕을 보여주겠다며 일부러 한 욕설이기는 했다. 그러나 방송은 이를 여과 없이 내보낸 것은 물론 자막에 개를 그려 넣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이날 방송은 ‘무한도전’을 의식한 방송의 극치를 선보였다. 이날도 어김없이 ‘언제까지 무한도전을 따라 잡는다’는 발언이 튀어 나왔다. 출연자의 생활기록부까지 숨김없이 공개하는 의식은 무한도전에서 이미 본 형식이었다. 심지어 똑같은 배경음악까지 등장했다. ‘방송인들의 처절한 리얼 휴먼 서바이벌’을 표방하는 이 프로그램은 ‘최고의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프로그램 진행자인 이경규는 이를 더 짧게 ‘막장 프로그램’이라고 요약해 표현한다. ‘무한도전’ 진행자인 유재석이 그 동안 숱하게 외쳐온 말이다.

프로그램 베끼기에 가까운 이 일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무한도전’의 대성공 이후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이 ‘무한도전’ 식의 막장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연예인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웃음을 유도하자는 전략이다. MBC는 ‘무한도전’의 성공에 자극받아 ‘무한걸스’를 선보였다. ‘황금어장’의 인기 코너인 ‘무릎팍 도사’나 ‘라디오 스타’ 역시 출연자들이 진땀을 빼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KBS 역시 무한도전과 흡사한 ‘1박2일’을 선보였다. 6명의 고정 출연자가 야생 체험을 모토로 1박2일간 고생을 한다는 형식이다. 이 코너가 포함된 ‘해피 선데이’의 또 다른 코너인 ‘하이파이브’ 역시 도전이란 명분으로 출연자를 힘들게 한다.

포맷뿐만이 아니다. 등장하는 캐릭터까지‘무한도전’과 비슷하다. ‘라인업’은 ‘무한도전’의 출연자 서열 매기기를 아예 제도화했다. 일정한 기간을 평가해 활약이 기대에 못 미치는 출연자는 방송에서 탈락시킬 예정이다. 악역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3사 예능 프로그램이 모두 마찬가지다. ‘1박2일’에서는 진행자인 강호동이 박명수-김구라와 같은 악역까지 겸한다. 또 ‘왕따’ 캐릭터도 선보인다. 정형돈(무한도전)-김경민(라인업)-이수근(1박2일)이다. 박명수-정준하, 김구라-김경민, 강호동-은지원 등 출연자 간의 대립 구도도 영락 없는 판박이다. 이들 사이에서는 막말과 욕설은 기본이고, 멱살잡이도 종종 벌어진다. 폭력 교실의 축소판이다. 요즘엔 몸싸움까지 종종 등장해 이종 격투기 현장을 방불케 한다.

‘무한도전’과 비슷한 부류의 막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방송 관계자들과 비평가들은 그 비결로 감정의 정화나 배설을 뜻하는 카타르시스를 꼽는다. 인기 연예인인 출연자들이 수모를 당하고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런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두 가지 감정을 갖게 된다. 우선은 출연자들이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인간적인 연민을 느낀다. 또 하나는 미운 구석이 있는 사람에 대해 속 시원히 욕하고 시비 거는 것을 보면서 통쾌한 기분을 느낀다. 그런 점에서 최근 예능 프로그램의 막장화는 방송이 솔직해진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방송이 자기 비하나 연민마저 상품화했다는 측면이 더 강하다.

‘무한도전’따라잡기에 나선 예능 프로그램들이 놓치는 점이 하나 있다. ‘무한도전’의 인기 요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출연자들이 정말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터무니없는 도전을 위해, 악천후나 진흙탕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시청자들은 출연자들의 이전투구를 단순히 몸 개그를 위한 소재로 보지 않고, 실제 힘겨운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시청자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열정을 높이 산다.

‘무한도전’은 이런 점에서 다른 막장 프로그램과는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1박2일’의 출연자들은 야생을 체험한다면서, 툭하면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는다. ‘라인업’도 마찬가지다.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깎아내리거나 자기를 망가뜨릴 뿐 마땅히 도전해야 할 목표도, 도전할 방법도 없다. ‘무한도전’ 식의 환경은 설전을 벌이기 위한 소도구일 따름이다. 포맷과 캐릭터, 구도 등에서 ‘무한도전’의 형식만 흉내낼 뿐 그 치열한 열정이은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이들의 무한도전 베끼기는 무리하거나 무모한 도전으로 보인다. 그저 모든 예능 프로그램이 갈 데까지 갔다는 느낌밖에는 없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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