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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찬의 프리즘] ‘낭비 마을’ 미국의 굴욕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미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던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10월 1일 “달러 패권 시대가 끝났다”고 말했다. 그날 달러-유로 환율은 도쿄 외환시장에서 한때 1.4283달러까지 치솟았다.

1999년 선보인 유로화 가치가 최고치 경신 행진을 벌이는 가운데 달러 가치는 변동환율제를 채택한 73년 이래 최저치로 떨어졌다. 더구나 9월 28일에는 캐나다 달러당 1.0052 미국 달러로 31년 만에 처음으로 캐나다 달러가 미국 달러 가치를 추월했다. 이쯤 되면 지구촌 공용 화폐인 ‘기축통화’로서 미국 달러화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린스펀의 말대로 달러는 점차 헤게모니를 잃고 있고, 그 자리를 유로와 파운드가 메우는 모습이다. 6월 말 현재 세계 중앙은행들의 보유 외환 중 달러 비중은 64.8%. 지난해보다 1.3%포인트, 유로화 출범 당시와 비교하면 6.2%포인트 낮아졌다. 말 그대로 유로화의 약진이다. 상대적으로 엔화의 위상 변화는 미약하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의 우화대로 미국은 금리·물가는 내리기만 하고 집값·주가는 오르기만 한다고 믿는 ‘낭비 마을’이다. 부지런히 공장을 지어 일자리와 물건을 만들어내는 ‘절약 마을’(아시아) 사람들의 제품을 빚을 내(달러를 찍어) 사 쓰다가 결국 돌이키기 어려운 무역·재정의 ‘쌍둥이 적자국’이 되고 말았다.

미국이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면 다른 나라에서 경쟁적으로 소화해 주었다. 강한 달러와 미국의 신용도를 믿었기에. 역설적으로 이게 미국의 소비 붐을 만들었다. 빚으로 창출한 소비였지만, 이를 바탕으로 미국 경제는 3% 이상 성장했고 세계 경제도 순항했다.

하지만 빚으로 꾸리는 살림에는 한계가 있는 법. 쌍둥이 적자가 불어나면서 팍스 달러리엄(Pax dollarium)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2001년 출범 이후 ‘강한 달러’ 정책을 내세웠지만 무역적자가 2002년부터 계속 최대치를 기록(2006년 기준 7635억8800만 달러)하면서 더 이상 강한 달러를 고집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아시아 절약 마을의 대표 주자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1조4000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쌓았다. 그 상당 부분이 미국과의 무역흑자에서 나왔고, 절반 이상을 미국 국채에 투자한 상태다. 미국에 물건을 팔아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 채권을 사들여 빚을 놓은 셈이다.

갈수록 가치가 떨어져 구매력마저 약해지는 화폐를 계속 갖고 있겠다고 고집할 바보는 없다. 미국 달러로 원유를 팔던 중동 산유국과 중국이 달러 비중을 줄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 달러 약세는 가속화하는 양상이다. 화폐는 실물경제의 그림자다. 달러 약세는 결국 그만큼 세계 정치·경제에서 미국의 힘이 약해짐을 뜻한다.

드러내 놓고 달러 약세를 용인하기 어려웠던 미국으로선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따른 금리 인하로 촉발된 이번 달러 약세를 자존심이 상하긴 해도 내심 즐기는 분위기다. 수출에 도움이 되고, 미국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 경상적자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7월 수출은 1376억8000만 달러로 1년 전보다 2.7% 늘었고 월별 수출액으론 사상 최대였다.

한 나라의 돈 값은 그 나라의 경제력을 반영한다. 외화 곳간이 텅 비어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긴급 자금을 수혈 받은 97년 말 한국 돈 원화 가치는 달러당 2000원에 육박할 정도로 곤두박질쳤다. 유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러던 것이 10월 2일 913원대로 높아져 외환위기 직전인 97년 10월과 같은 수준이다. 그렇다고 10년 사이 우리 경제의 체질이 강해졌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약해진 달러 때문에 환전하는 데 원화가 덜 들어간다고 너도나도 해외 여행길에 올라 마구 신용카드를 긁어대다간 우리도 미국처럼 ‘낭비 마을’로 전락할 수 있다.

그린스펀의 말이 아니더라도 달러 패권 시대가 저무는 이때 우리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당장 2572억 달러로 세계 5위인 외환보유액의 달러 비중을 다변화해야 한다. 기업의 수출입대금 결제 통화도 마찬가지다.

나빠지는 수출 채산성을 보충할 기술 및 제품 개발에도 신경 써야 한다. 그리고 장차 미국 달러가 ‘기회의 돈’으로서 빛을 잃어가면서 유로나 위안화 시대가 올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양재찬·편집위원 jay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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