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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할말은하자>6.현대자동차 李榮馥노조위원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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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민주화 바람이 노동계를 강타하고 있던 87년 9월 26일 오전 9시 울산 현대자동차 본관앞 잔디밭에서는 살벌한 광경이 벌어졌다. 李榮馥노조위원장(49)이 7천여명의 조합원들에게 둘러싸여 전날 회사측과의 임금협상에서 직권조인했던 사유를 설명하기위해 임시연단인 드럼통 위로 올라가는 순간『어용노조 물러가라』는 성난구호가 들려왔다.
곧이어 비오듯 돌멩이가 날아왔고 누군가가 그의 머리채를 낚아챘다.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그에게 각목을 든 조합원들이몰려왔다.
같은달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됐던 그는『노사간 대립기간은 적을수록 좋다』『생산에 대한 책임은 노조가 져야한다』『일단 빵을 키워 놓고 나눠가져야한다』는 소신을 밝혔었다.
곧이어 있은 회사측과의 추가임금협상에서 5만원을 요구해 2만7천원을 따내자 서슴없이 직권조인 해버렸다.조합원의 총의를 묻지 않고 직권조인한 것은 李위원장이 취임하기 전에 임시집행부가회사측과 체결한 단체협약에 따른 정상적인 절차였 다.
그러나 당시 전국을 휩쓴 투쟁열기로 흥분상태에 있었던 조합원들의 눈에는 李위원장의「소신」과「행동」이 회사측과의 야합으로 비쳐진것이다.
실신한 李위원장은 현장에 있던 사무차장 鄭淳魯씨(35.現 정책실장)의 등에 업혀 동강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져 열흘동안 누워있어야 했다.그래도 그의 소신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온건합리노선에 불만을 품은 노조내 반대파들은 매일밤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일삼았다.
그의 뜻을 이해하는 대의원들조차 일반조합원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자 등을 돌리기 일쑤였다.
결국 인기없는 위원장이었던 그는 89년 8월 2대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3위에 그쳐 연임에 실패했고 91년 8월과 92년 7월의 3,4대 위원장선거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조의 3만여 조합원들은 93년8월 제5대위원장선거에서 그를 다시 선택했다.
노조는 그해 재야노동세력과 연대해 45일간 파업을 벌여 긴급조정권까지 발동되는 상황을 겪었지만 남은 것은 노사간 갈등과 반목뿐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일관성이 있는 李榮馥이라면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낼수있을 것』이라는 조합원들의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것이다. 〈李夏慶기자〉 그는 취임하자마자 재야노동세력과의 단절을 선언했다.그리고 現總聯측에도『시대변화에 맞춰 재야와 연대한정치투쟁보다 조합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실리위주의 조합활동을위해 노력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는 자신의 제의가 거부되자『정치투쟁에 아까운 조합비를 낼수없다』며 미련없이 맹비납부를 중단,現總聯을 탈퇴했다.
그러자 現總聯은『현대자동차노조 집행부만 제명하고 조합원은 존속시킨다』는 다분히 감정적인 결정을 내렸다.
합리적 실리노조의 당위성을 확신하고 있는 李위원장은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고 거침없는 행보를 계속했다.
노조의 도덕성 회복차원에서 과거 집행부가 유용.남용한 조합비수백만원을 되돌려받기까지 했다.
엄격한 예산 집행으로 1년 예산 21억원중 10억원을 남겨 적립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역대 집행부가 6년간 적립해 놓은 금액은 11억원뿐이었다.
李위원장은『조합원들을 위해 귀하게 쓰여져야할 조합비가 인기에영합해 남용되거나 불법투쟁기금이 해고자 생계비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조합원들이 가장 꺼려했던 토요일 야간근무를 자원하는 분위기가정착돼 가동률이 일본 자동차업계 수준인 97~98%을 기록, 올해 생산성 대상을 수상한 일련의 변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조를 골칫거리로만 여겨왔던 회사측의 태도도 당연히 1백80도 달라져 노조가 협조요청하는 일이라면 이제 발벗고 나서고 있다. 그에게 돌팔매질하고 협박전화를 했던 조합원들조차 이제는 그를 현대자동차노조의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있다.아직도 勞使를 대립관계로 전제하고「제3자」로 일컬어지는 외부세력까지 끌어들여연대투쟁을 벌여서라도 당장의 노조몫을 몇푼이라도 더 늘리면「선명」하고「민주」적인 노조라고 착각하는 정치지향의 왜곡된 노동운동에 李씨가 이끄는 현대자동차노조는「할말은 하고 해야할 행동」을 하는 신선한 반란이다.이제 제2,제3의 李榮馥이 줄이어 나와야 할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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