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중인물탐구>서울의 달 춤선생 열연 김용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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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뺑뺑이 바닥이라는 게 다 그래.서로 얼싸안고 돌아갈 때나 너 좋고 나 좋고지 의리라곤 빡빡 긁어야 누룽지찌꺼기 만큼도 안 나온다니까.』 후배인 제비 홍식이(한석규 扮)가 괴한들에게몰매를 맞았다.급히 홍식이를 병원에 데려간 달동네 퇴역 춤선생박씨(金容建 扮.48)는 홍식의 사고에 후배들이 아는척을 않자넋두리를 늘어 놓는다.
『서울의 달』한 장면.
춤꾼에게도 자존심은 있다.왕년의 춤꾼 박선생은 비록 초라한「달동네의 퇴물」로 전락했지만 그에게 춤은 여자를 홀리는 제비의무기가 아니라 원칙이 있는 예술이다.『돈이 궁해도 춤은 변두리보다 강남에서 추어야 스텝이 산다』며 마구잡이로 춤을 남발하는후배를 꾸짖기도 한다.약수터에서 마주친 여인네들이 도시 본척을안해준다.「옛날 같으면 다 내앞에서 아양을 떨 여자들」이라는 박씨에게「과거」는 더욱 큰 자존심으로 대비되어 살아난다.
극중 박씨는 그러나 갈수록 기가 죽어간다.무허가니 춤값을 깎자고 졸라대는 여인네에게『깎을 게 따로 있다』며 자존심을 내세우지만 뒤돌아서는 그녀를 결국「반값」에 붙잡고 만다.춘섭이(최민식 扮)가 남겨놓은 마지막 라면 한개를 몰래 끓 여 먹다 들켜 허둥대는 모습.보람이에게 떡볶이를 해주고 싶지만 떡 살 돈이 없어 호순이에게 호소하고 만다.인형에 눈을 다는 부업을 하느라 어깨가 축 늘어진 그의 현실에 더블마이,반짝반짝한 백구두는「왕년의 허세」일 뿐이다.
과거는 늘 두가지로 다가온다.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구석,인정받고픈 화려한 순간들이 서로 뒤섞여 나타나기 마련.그러나 박씨에게 과거는 점차「회한」으로 겸허히 다가오고 멋진(?)자존심을 사그라지게 한「각박한 삶」을 익히 아는 시청자들은 그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끼고 만다.
『애당초 순진한 여자에게 춤을 가르쳐서 이렇게 만든 건 제 탓입니다.앞으로는 죄 안짓고 잘 살겠습니다.하느님 제발 이 여자가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라며 병중인 과거 춤 제자 보람엄마손을 부여잡은 박씨의 서글픈 독백에 자신의 지난 날을 한번쯤 되돌아 볼 팬들도 있을듯 하다.
〈崔 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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