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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세계바둑오픈' 큰 승부일수록 낙관이 필요한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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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제8회 세계바둑오픈 준결승 제1국
[총보 (1~229)]
白.朴永訓 5단 黑.謝 赫 5단

우세한 셰허는 왜 갑자기 몰락했을까. 실체를 버리고 허상을 쫓아갔기 때문이다. 실체와 허상은 크게 다른데 셰허와 같은 고수가 왜 그걸 구별하지 못했을까. 바로 이대목에 큰 승부의 미묘함이 숨어있다.

이판에서 셰허5단은 53과 57, 두번의 강수를 성공시킨 데다 65~73까지의 효과적인 실리전법으로 형세를 크게 리드하게 된다. 그러나 셰허 역시 우세를 승리로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강자가 그래왔던 것처럼 스스로 의심암귀(疑心暗鬼)에 빠져들고 만다.

박영훈5단이 던진 우상귀 74의 응수타진은 아주 평범한 한 수였다. 받아주면 그만인 수였다. 그러나 셰허는 형세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과 의심에 사로잡혀 우하귀를 75로 따내고 만다. 이 대목을 옮긴 것이 '참고도'다. 백1에 흑2의 따냄. 이 바람에 갈 길을 찾지 못해 고심참담하던 박영훈은 단숨에 우상귀에서 살며 한줄기 서광을 보게 된다.

기왕 귀를 살려준 바에야 흑도 75의 의지를 살려 A로 끊어야 했다. 그러나 다시금 조바심을 느낀 셰허는 좀더 뭔가를 해내려고 10으로 공격에 나선다. 우상귀를 살려주고 보니 당했다는 느낌이 든 것인데 이 10의 공격이야말로 실체를 놔두고 허상을 쫓는 순간이었다.

백△들은 허약해 보였지만 흑▲의 포위망이 약해 섣불리 공격해서는 안될 돌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11의 귀수(鬼手) 한방으로 공격은 무산되고 이로써 흑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우하귀로 되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승부도 그때는 이미 역전돼 있었다. 신중함과 조심성은 승부의 미덕이다. 그러나 큰 승부일수록 역설적으로 낙관이 필요한 법이다. 셰허는 좋은 기술에도 불구하고 신경줄이 엷었고 너무 조바심을 냈다. 초반의 좋은 형세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대목에서 셰허는 비탈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229수 끝, 백 3집반승.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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