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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2.닥터 지바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어쩌다 로열 발레의 공연을 볼 때도 가끔 그렇게 느끼고는 했지만 카를로 폰티가 제작하고 데이비드 린이 연출한『닥터 지바고』를 보고 있으면 가끔 영화가 아니라 무슨 사진집을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느껴진다.장면 하나하나를 그냥 잘라 틀에 끼워 넣기만 하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예술사진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기때문이다.
어머니의 장례식날 자작나무 가지들이 흔들리며 참새떼처럼 낙엽이 쏟아지고 밤에는 손바닥만한 창문을 두드리는 눈꽃핀 나뭇가지들,얼어붙은 전차가 지나가는 모스크바 거리에서 검은 옷을 걸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음침한 풍경,꽃무늬 베일을 쓴 줄리 크리스티의 눈부신 금발,어둠속에서 조그맣게 드러나는 라라의 손,시커멓게 커다랗고 충혈된 오마 샤리프의 이집트인 눈망울,대사는들리지 않지만 창문 저쪽에서 촛불을 켜놓고 고민하는 라라와 파샤의 모습,하얀 눈벌판을 달리는 기 차,겨울의 강,쌓인 눈을 쇄빙선처럼 파던지며 달려나오는 기차,들판에서 얼어죽어 눈에 반쯤 파묻힌 시체들,파샤가 총을 맞는 순간 눈덮인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구식 안경,전장의 하늘을 가득 채운 황혼,병원 탁자에 탐스럽게 꽂혀 있는 따뜻 한 해바라기,우랄 열차의 문을 덮어씌운 얼음,검고 칙칙한 폐허의 풍경,바라키노의 책상에 손가락 자국을 남기는 먼지의 켜….
대사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줄거리를 모르더라도 이 영화는 그림만 보면 조금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정성스러운 그림들이 하나씩 모여서 모리스 자르의 감동적인 음악(라라의 주제곡)을 깔고 운명의 회오리를 헤쳐나가는 추운 나라 사람들의 얘기를 펼쳐낸다.
움직이는 화폭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이 작품은 원작 자체가 지니는 묵직한 내용 또한 압도적이다.삶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는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혁명이라는 말을 내세우고 사치스러운정신적 유희에 빠지는 것을 우리들은 요즈음에도 자주 보지만 혁명이란 얼마나 야만스럽고 켸켸묵은 진부한 개념인가.혁명은 인간성을 부정하는 불량한 현상이고 적군과 백군이 벌갈아가며 국민을유린하느라고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은 모조리 쏴죽였던 역사의 시기는 결국 인류를 위해 무엇을 남겼는가.파스테르타크는 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저항하고 결국 인간성이 승리의 씨앗을 잉태한다는웅변을 바라키노에 숨어들어 시를 쓰는 지바고를 통해서 얘기한다. 혁명이란 결국 기존질서를 파괴하는 반역 행위요,역사로 하여금 거꾸로 흐르게 만드는 파괴적인 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우리들은 지바고와 라라와 스트렐니코프의 삶을 통해 보게 된다.
사람들이 만나고 엇갈리고 헤어지는 운명의 방황속에서 우랄산맥너머 바라키노는 인간이 없어서 오히려 풍경이 아름답고 인간이 없어서 증오와 파괴가 존재하지 않는 안식처를 상징한다.그래서인지 영화에서도 바라키노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영 상으로 그려진다.지바고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의 성에를 녹이고 내다보는 겨울벌판의 풍경이 노란 꽃밭으로 바뀌며 라라의 주제곡이 크레셴도로타고 봄이 오는 장면을 그대는 기억하는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평생 「파우스트」등 많은 번역을 하고 시를 썼으며,몇 편의 단편을 남기기는 했지만 장편소설이라고는 『의사 지바고』한 권뿐이다.작가가 그의 삶을 모두 정리해 단 한 권의 책만 남기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크나큰축복인가.
내가 본 영화들 가운데 『닥터 지바고』와 가장 스케일과 분위기가 비슷했던 작품은 국제적인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작 『붉은 수염』이었는데,일본의 의사 검객과 러시아의 시인 의사 얘기를 담은 그 두 편의 영화는 하나가 흑백 시네마스코프에죽음의 음산한 분위기를 담은 반면 다른 하나는 유화로 그린 생명의 힘을 담았다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지바고」는 러시아어로 「생명」을 뜻한다고 한다.) 동양과 서양에서 1965년같은 해에 주제도 비슷하고 상영시간까지도 비슷한 이 두 영화(『붉은 수염』은 185분이고 『닥터 지바고』는 180분)가 동시에 선을 보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서로 비교해 보는 것도흥미있는 일이다.
〈안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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