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파실체와실태>上.김일성주체사상이 이념.목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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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朴 弘 서강대총장의 운동권 주사파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계기로 대학가「主思派」의 실체가 새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80년대이후 두드러진 이념편향이 극단까지 치달은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주사파의 실체와 실태를 3회에 걸쳐 싣는 다.
[편집자註] 5共말기인 86년 여름 고려대앞 한 술집에서 일어난 일이다.골방에 앉은 운동권학생들은 당면한 과제와 정국전망에 대한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갑자기 선배인 한 학생이 일어나『주사에 따르면』이라고 서두를 시작하자 모든 학생들은 입을 다물었다. 당면 투쟁과제에 대한 정연한 논리전개.그 학생은『조국의 모순을 걱정하는 청년학도라면 마르크스.레닌의 기계적 혁명론이 아니라 우리실정에 맞는,인간을 행동과 사상의 주체로 세우는주체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는 말로 결론지었고 나머지 학 생들은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공안당국조차 당시에는 주사파가 무엇인지감조차 못잡고 있었지만 학생운동권은 고려대를 중심으로 이미 주사와 비주사파간의 치열한 사상투쟁이 전개되고 있었고 추는 이미주사파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주사파-.주사파란 말 그대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학생운동의 이념과 목표로 하는 운동권 학생들을 통칭한다.학생들 스스로도 자신을 주사파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주사파의 첫 등장은 85년말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70년대식 낭만적 운동은 가고 80년대초에는 너나없이 과학적 운동,즉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창궐했고 학생운동의 고양과 더불어 운동권은 우리사회의 마지막 금기,즉 김일성주의에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85년4월 고려대에서 민족통일.민중해방.민주쟁취의 3민을 내건 三民鬪특별위원회가 결성되며 내부투쟁을 거듭하던 학생운동은 정리됐다.
삼민투는 5월부터 서울역앞 가두시위등 21차례의 시위를 주도했지만 5월23일에는 서울 美문화원 점거농성을 계기로 위원장이던 許仁會씨(당시 고려대정외4)등 조직핵심 79명이 구속돼 40여일만에 와해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86년3월21일 서울대에서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民民鬪)가,8일후인 29일엔 역시 서울대에서 구국학생연맹(救學聯)이 탄생한다.
삼민투의 구심점이 사라진뒤 입장이 다른 학생운동권이 분열을 시작한 것이다.
구학련은 산하기구로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自民鬪)가 같은해 4월 조직됐고 이 자민투가 주사파의 모태다.
민민투와 자민투는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부터 다르다.
민민투가 우리사회를 신식민지국가독점 자본주의로 규정,노동자.
농민이 미제국주의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동시에 축출하는 혁명을 일으키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식 운동을 주장한데 비해 자민투는 한국은 신식민지 반봉건사회이므로 혁명은 미제국주의 자를 먼저 쫓아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봤다.
노동자.농민만이 주체가 아닌 청년학생과 야당,진보적 지식인을모두 포괄하자는 이같은 주장은 물론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을 답습한 것이다.이후 자민투는 주사파의 운동이념으로 등장한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NLPDR)을 정 립하고 이를 홍보할 기관지「해방선언」을 발간한다.
조직원의 행동강령과 규약.생활수칙등을 정해 조직에 강제성을 부여하고 북한방송 구국의 소리를 녹취한「해방선언」「구국의 함성」등의 유인물이 대학가에 배포되기 시작한다.
자민투와 민민투의 처절한 사상투쟁은 서로의 논리를 더욱 더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몰아가는데 크게 기여했다.자신들의 논리를 더욱 정교히 하기 위해 민민투 학생들은 마르크스.레닌의 원전을학습하기 시작하고 자민투 측에선 보다 손쉬운 정 세분석을 위해북한방송을 청취하는 붐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민투의 민족해방 우선논리(NLPDR)를 받아들이면서도「위수동(위대한 金日成 수령동지).친지동(친애하는 金正日 지도자동지)」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주사파가 생겨나 내부 분열을 맞기도 했다.
운동권내 이같은 반론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주사파는 87년8월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全大協)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전성기를 맞게된다.
5共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에 분노한 수많은 젊은 대학생들은「백만학도 구국의 대오」인 전대협을 전폭 지지했지만 전대협지도부가 이미 김일성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됐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들은별로 많지 않았다.
〈崔熒奎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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