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20> “우리 골키퍼는 앰뷸런스 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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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 토요일 오후,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 보조구장에서 ‘서울 더비’가 열렸다. 순수 아마추어 축구 전국리그인 K3의 서울 유나이티드(서유)와 은평 청구성심병원의 맞대결이었다.

경기장 열기는 K-리그 못지 않았다. 300명을 헤아리는 서유 응원단은 대형 깃발을 흔들며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인터넷 동영상 중계도 했다. 세 명의 서유 서포터스로 구성된 중계진은 자기 팀을 두둔하는 멘트와 해설을 쏟아 내며 ‘편파 중계의 진수’를 보여 줬다.

서유의 선수진은 막강했다. 안양 LG(현 FC 서울)의 98년 FA컵 우승 주역 제용삼과 우제원이 공·수를 이끌었고, 후반 시작하면서 97년 K-리그 신인왕 신진원이 투입됐다. 종료 20분을 남기고는 감독 겸 선수 임근재(92년 K-리그 득점왕)가 나와 선수로서 고별전을 치렀다. 이들은 모두 ‘투잡스 족’이다. 주중에 학교·클럽팀 지도자나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고, 금요일 저녁에 모여 발을 맞춘 뒤 주말 경기에 출전한다. 출전수당 10만원, 승리수당 10만원을 받는 게 전부다.

청구성심병원도 마찬가지다. 원무과 직원도 있고 앰뷸런스 운전기사도 있다. 축구가 좋아, 선수로서 꿈을 접기에는 너무 아쉬워 낮에 일하고 밤에 공을 찬다. 축구광인 소상식 병원장이 이들을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 있게 했다.

“축구 선수 출신 몇 명을 채용했는데 워낙 성실하고 일도 잘했어요. 그래서 계속 선수 출신을 뽑다 보니 팀이 만들어졌고, 올해 출범한 K3에 뛰어들게 됐죠.”
소 원장에게 이들은 모두 자식 같다. 소중하고 애틋하다. 고교·대학에서 매년 수천 명의 선수가 졸업하지만 프로나 실업팀에 입단하는 숫자는 10%도 안 된다. 나머지는 일정한 직업 없이 겉돌거나 술집 종업원으로 빠진다. 소 원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의사·변호사가 전문가라면 이들도 전문가예요. 남들이 공부할 동안 죽어라 공을 찼다는 게 다를 뿐이죠. 그런데 왜 이들이 사회에서 낙오자가 돼야 합니까.”
급여 외에 팀 운영에 들어가는 돈은 연간 1억원 남짓. 모두 소 원장이 부담하지만 병원 홍보와 직원 단합이라는 효과는 결코 작지 않다.

올해 각급 대표팀 성적은 최악이었다. 프로선수들은 온갖 추태로 팬을 실망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풀뿌리 축구’가 조용히 지평을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K3는 올해 10개 팀으로 시작했지만 내년에 6∼10팀이 더 참가하게 된다. K3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K4, K5도 만들어질 것이다.

학원 축구의 뒤틀린 구조에 짓눌려 ‘운동 기계’로 전락한 우리 친구와 선후배들. 이들이 당당한 사회인으로, 스포츠인으로 서는 날 한국 축구는 새 봄을 맞을 것이다.

정영재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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