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베를린·칸 영화제서 각각 호평 받은 두 동포 감독의 ‘영화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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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밖에서 영화를 만들어온 동포 감독 장률(右)과 정이삭. 영화로 하나가 된 그들에게는 국적도, 나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진=송봉근 기자

 12회째를 맞은 올 부산국제영화제의 공식 슬로건은 ‘경계를 넘어서’(Beyond Frame)다. 지역과 국가, 과거와 미래, 디지털과 아날로그 등 세상의 고정틀을 넘어서겠다는 뜻이다. 마치 이를 대변하듯, 흔히 생각하는 ‘한국영화’라는 프레임 바깥에서 주목할 영화를 들고 온 두 명의 동포 감독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각각 중국과 미국에서 나고 자란 장률(45) 감독과 정이삭(28·미국명 아이작 리 정) 감독이다. 장 감독은 국경을 넘어 몽골에 이른 탈북자 모자와 사막으로 변해가는 땅에 묵묵히 나무를 심는 몽골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경계’(원제 히야쯔가르)로, 정 감독은 참혹한 내전을 겪었던 아프리카 르완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문유랑가보’로 부산에 왔다. 올 베를린(경계)·칸(문유랑가보) 등 이름난 영화제에서 이미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한국 제작사와 만든 ‘경계’는 ‘한국영화의 오늘’ 부문에, ‘문유랑가보’는 아시아 바깥의 신예를 소개하는 신설 부문 ‘플래시포워드’에 각각 초청됐다.

 두 사람은 첫인사부터 쉽게 통했다. “르완다에서 영화를 찍었다면서요. 나는 몽골에서 찍었어요.”(장률) “저도 내몽골을 여행한 적이 있어요. 중국에서 단편영화 찍은 적도 있고요.”(정이삭) “외몽골을 가야지. 나는 일만 하다 왔는데, 같이 다시 갑시다. 낭만이 있는 곳이에요. 몽골 여배우 소개시켜 줄게요.”(장) “저 결혼했는데요.”(정) “상관없어요. 사람 만나는 게 기쁜 일이지.”(장)

 영화에 담긴 무서운 내공과 달리 유쾌한 농담을 쉬지 않는 장률 감독과 첫 부산 나들이에서 진지함을 잃지 않는 정이삭 감독의 대화를 간추린다. 20년 가까운 나이 차이도, 조금 불편한 한국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향이 아닌데도 그립다

 정=부산은 처음인데 참 기분이 좋아요. 한국은 네 번째인데, 올 때마다 노스탤지어를 느껴요.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자꾸 오고 싶어요. 칸·토론토· 세르비아 등 다른 영화제도 다녀봤는데, 부산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질문이 제일 좋았습니다. 진지하고, 영화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장=한국에 오면 정이 있지요.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타고 좀 있으면 술부터 생각나요.(웃음) 중국에선 안 마시는데, 한국 오면 많이 마셔요. 중국에서 왔다면 불법체류자 아닌가 여기는 게 짜증나기도 했는데, 이제는 재미있어요. 오는 길에 공항에서 노년 부부가, 아마도 중국 동포인 것 같은데, 걸음마다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더라고요. 뒷사람들이, 저도 불편해했는데, 문득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어요. 평생 처음 한국에 오는 모양이더라고요. 경계요? 사람 사는 데는 다 경계가 있지요. 예술을 하는 게 그 경계를 넘어서려고, 넘어서 소통하려고 하는 거죠.

 

◆영화로 경계를 넘는다

 정=저에게는 르완다에서 왜 영화를 찍었냐고 많이들 묻는데, 자연스럽게 찍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미국이 내 나라라는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이 없었고. 국경, 경계 이런 게 예전에는 없었던 시절도 있잖아요, 바꿀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장=요즘은 중국에서도 한국영화를 많이 봅니다. 한국영화를 보면 다른 영화를 볼 때 같은 원칙이 없어져요. 서울 거리가 어떻게 변했나, 이런 모습만 눈에 들어와요. 이렇게만 말하면 나한테 술 사는 한국 감독들이 싫어하겠다.(웃음) 한국에선 본 사람들이 드물던데, 박기용 감독의 ‘낙타들’이 참 좋았어요. 해외영화제에서 보고 바로 만났었지요.

 정=저는 주로 예술영화를 보는데, 한국영화라고 특별한 생각은 하지 않아요. 영화를 처음 공부할 때 이창동 감독님 영화를 봤어요. 어제 (칸영화제에서 인사를 나눴던) 이창동 감독님과 만나서 커피 마셨어요.

 장=이창동 감독은 술 많이 안 사는데.(웃음) 술도 많이 안 하고, 그 집안 형제들 중에 제일 재미없는 사람이에요.(웃음) 실은 영화 만들기 전부터 서로 알고 지냈어요.

 ◆만나고 싶은 관객들

 정=‘문유랑가보’는 르완다 관객들에게 제일 보여주고 싶어요. 소규모로 한번 했고, 내년에 크게 상영해요. 그동안 르완다에서 찍은 영화들이 대부분 외국 관객을 위한 영화라서, 르완다 사람을 위한 영화를 찍고 싶었어요. 달리 어떤 관객이나 영화제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죠.

 장=영화 찍을 때 감독들은 자기 생각밖에 안 하죠.(정 감독이 맞장구를 친다) 연애할 때 여자 생각만 하지, 장인·장모 보고 연애 하나요. 물론 관객과 만날 때는 긴장이 되죠. 장모님 처음 만날 때처럼. 4월에 ‘경계’가 바르셀로나 영화제 개막작이었는데, 다음날 초청 아닌 일반상영 때 정말 사람들이 돈 주고 영화를 보나 가봤죠. 길게 줄을 섰더라고요. 음식점 주인 하나가 제 영화를 봤다며 이런 저런 얘기도 하더군요. 순수한 보통 관객이 할리우드 영화만 좋아하는 건 아니죠.

 정=돈(제작비·흥행)만 신경 쓰면 좌절할 때도 있어요. 큰 회사들이 예술영화는 ‘똑똑한 사람’ ‘잘 배운 사람’ ‘부자인 사람’만 좋아할 거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장=어, 내 영화는 상업영화예요. 앞으로 제작비 더 벌 거예요.(웃음)

 ◆한국, 중국, 그리고 미국의 다음 얘기

 신작 구상도 들어봤다. 장 감독은 1970년대 전북 익산의 이리역 폭발사고를 모티브로 한 ‘이리’(가제)를 준비 중이다. 중국 쪽 얘기와 한국 쪽 얘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구성이 될 것 같다. 그는 역시나 농담을 빼놓지 않았다. “한 편 값으로 두 편을 보는 셈이니 장사가 잘되지 않겠어요.”

 정 감독은 실제 친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구상 중이다. 암에 걸려 죽게 될 것을 알고 함께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는 로드무비다. “제럴드 스턴이라는 시인의 시 ‘러키 라이프’의 느낌을 담으려고 해요. 시인을 만나서 허락도 받았고요. 아마도 요번에는 좀 더 미국 이야기를 할 것 같아요. 실제의 미국이 아니라 밖에서 보는 미국이라는 컨셉트를요.”
 

부산=이후남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장률=본래 문학을 전공했다. 30대 후반에 영화로 눈을 돌렸다. 전직 소매치기의 일상을 담은 첫 장편 ‘당시’(唐詩·2004년), 김치를 팔아 먹고사는 조선족의 이야기 ‘망종’(芒種·2005년)이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경계’는 다음달 8일 개봉할 예정이다.

◆정이삭=의사를 꿈꾸다가 대학시절 교양과목으로 접한 영화의 매력에 빠졌다. 홍콩 출신의 아내가 매년 자원봉사를 떠나는 르완다에서 직업 배우가 아닌 르완다 사람을 주인공으로, 르완다 말로 만든 ‘문유랑가보’가 데뷔작. 3만 달러의 초저예산으로 완성해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칸영화제에 출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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