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영국 총리의 '안심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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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달 말 영국 정계는 보수당 의장을 지낸 로드 테빗 의원의 말 한마디로 떠들썩해졌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후계자는 노동당의 고든 브라운"이라는 그의 발언 때문이다. 지금도 노동당의 강령과 가장 먼 대척점에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대처가 골수 운동권 출신인 노동당 당수를 후계자로 생각한다니 정치인들이 술렁일 법도 했다.

그러나 정작 영국 국민은 엉뚱한 해석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브라운은 총리 취임 전인 5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26대 51(노동당 대 보수당)이던 지지율 차이를 집권 3개월 만에 44대 33으로 뒤집어놓을 정도로 이미 국민 다수의 지지를 끌어 모은 정치인이기 때문이었다.

6월 말 집권 당시만 해도 영국 언론, 심지어 노동당에서조차 그의 성공 가능성을 그다지 크게 보지 않았다. 전임자인 토니 블레어나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당수 같은 정치감각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다. 경제관료로선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총리는 정치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그 비결은 믿음의 리더십 덕분이다.

취임 초기 터진 잇따른 악재에서 그의 진가는 빛났다. 7월 초 런던 도심 등에서 테러 불발 사태가 연이어 터지자 그는 재빨리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직접 나서서 담화를 발표해 국민을 안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려한 언변은 아니지만 국민은 그의 진지한 얼굴과 오랜 관료 경력에서 우러나오는 무게감에 안정을 얻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서 국민은 그를 믿을 만한 지도자(71%)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근의 노던록 사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경제 위기에서 심리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모든 예금 지급은 정부가 보장한다고 발표했다. 그 후 다른 금융기관으로까지 이어질 뻔한 인출 사태는 조기에 진화됐다. 총리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빨리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에 대한 신뢰도와 따로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브라운의 정치 참모들은 그에게 '쇼맨십'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정작 국민은 지도자의 그럴 듯한 말솜씨나 포장술보다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는 지도력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브라운의 조용하고 국민을 안심시키는 리더십은 대선을 2개월여 앞둔 우리나라에도 많은 시사를 던진다. 화려한 언변과 좌충우돌하는 불안한 쇼맨십에 지친 국민일수록 조용하고 일하는 지도자를 주목하기 때문이다.

전진배 파리특파원